[동아광장/이신화]당당한 대표 경력 “육아”

  • 입력 2007년 12월 21일 02시 58분


코멘트
인간의 역사를 바꾼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통신혁명, 생명공학혁명이 ‘젠더(gender)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알파걸, 골드미스, 립스틱 리더십 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약진은 세계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학업,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성을 능가해 가는 여풍(女風)은 교육 현장에서 가장 매섭게 불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학생회장 선거에서 여학생 후보가 남학생보다 많고, 각종 경시대회에서 여학생이 앞서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중고교에 진학하는 남학생의 학부모가 내신 성적을 걱정해 자기 아들이 남녀공학 학교에 배정받는 것을 꺼리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 ‘아들의 출세가 먼저’라는 선입견에 가족이 생계위협을 받게 되면 딸의 취학 중단을 택했던 것과는 달리, 출생 때부터 동등한 부모의 관심과 교육을 받게 된 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여학생 1등 현상’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외무고시 합격자의 68%, 행정고시 합격자의 49%가 여성이고, 사법연수원 수료생 가운데 판사로 신규 임용된 3명 중 2명이 여성이며 의사시험 합격률도 여성이 남성을 웃돌았다. 또한 20대 여성의 취업률은 같은 연령대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다.

알파걸 저출산 해결 첫째 과제

여성들의 약진을 두고 ‘딸들의 반란,’ ‘절반에 대한 발견’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제 여성 자원의 활용은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젠더혁명이 실현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장벽이 남아 있다. 올해 유엔이 발표한 여성권한척도에서 한국은 64위로 지난해보다 오히려 5계단 하락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여성 경제활동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그중 몇몇은 그 분야의 선두에 서기 시작했지만, 이들의 승진을 가로막는 암묵적이고 비공식적인 차별인 ‘유리천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종종 여성은 집단 중심의 사고 및 행동을 강조하는 조직사회에서 효율성과 단결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능력은 있지만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험 성적은 우수하지만 면접 점수나 근무평가 점수 등으로 인해 고용이나 승진에서 여성이 불이익을 받는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활동에 있어 더 큰 유리천장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집중돼 온 육아와 가사문제이다. 출산으로 결원이 발생하면 경영진 차원에서는 대체인력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육아 부담을 짊어진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평균 근로시간이 적고 그만큼 기업에 보탬이 덜 된다면 승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업문화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알파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동분서주 정신이 없는 슈퍼맘이 되거나 아니면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신생활을 즐기는 골드미스족이나 결혼하되 맞벌이하며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 되는 것이다.

정부는 ‘저출산 쇼크’에 대응하고자 육아휴직, 보육료 지원 확대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본 “출산 포기 각서를 써도 좋으니 뽑아 주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한 여성 의사의 개인적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저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같은 사회적 우려가 해소되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제 정부 차원의 재정적 제도적 지원 및 일상생활에서의 남녀 역할분담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뿐 아니라, 육아를 경제활동에 버금가거나 더 중요한 일로 인정해 주는 사회 풍토가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경제활동만큼 중요” 인식 전환을

혹자는 일과 가족을 양립시키기 위해 ‘슈퍼우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가사나 육아를 제대로 못 한다는 죄책감을 접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집안일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자녀를 올곧은 인간으로 키우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여성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오늘도 시간에 쫓기며 학교 일을 하다가 축구화를 못 찾겠다는 초등학생 아들의 전화를 받고 전전긍긍하면서, ‘육아’는 이력서에 당당히 적어야 할 대표 경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신화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