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종섭]‘도금시대’에 갖는 유감

  • 입력 2007년 6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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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시장이 돈으로 불탄다. 부동산 시장과 주식 시장으로 몰려다니던 전함 같은 뭉칫돈이 미술품을 덮쳤기 때문이다. 작품의 수준이나 예술적 가치에 관계없이 묻지 마 투기를 한다. 미술평론가조차 판꾼들의 놀이에 입을 다물고 있다. ‘○○○의 것 40억 원어치 싸 주세요’ ‘너, ○○○ 것 없지 않니, 이번에 하나 챙겨’ ‘이번에 사 모아서 기획전 한판 열면 10배 튀는 장사다’ 하는 식이다.

공연 티켓 값은 보통사람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해외에서 관람하는 비용보다 훨씬 비싸다. 외국 사람은 마시기도 어려운 고급 양주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명품 브랜드는 다른 나라 가격의 몇 배를 뒤집어쓰면서도 먼저 사려고 아우성이다. 공급이 달리니 가짜가 판을 친다. 와인 바를 다니며 수십만 원짜리 포도주도 간단히 마셔 없앤다. 포도주 값만 천정부지로 솟는다. 수천만 원대 파티가 경쟁적으로 열리고, ‘그들’끼리만 어울린다.

진짜 작품을 알고 가지려는 사람은 이미 올라 버린 가격에 엄두조차 못 낸다. 공연장은 가진 자들만의 잔치판이고, 제값에 물건 사려는 사람은 부자들이 설치며 올려놓은 값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든지, 그만두든지 해야 한다. 부자들의 이런 행태를 잡겠다고 종합부동산세니 뭐니 하며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퍼부어 대도 설상가상으로 집 있는 보통사람들만 파편 맞아 쓰러지고, 보통사람은 공연 보기가 더 어려워진다.

황금만능주의 판치는 세상

‘돈으로 도배질 된 시대(Gilded Age)’란 말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상업자본이 농업자본을 보기 좋게 격파한 남북전쟁 이후 187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을 맞이했다. 철도, 은행, 광산, 철강, 금융, 신문, 통신 기업이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되자 신흥 부자가 속출했다. 밴더빌트, 록펠러, 모건, 카네기, 플래글러 등 세계적인 억만장자를 제쳐 놓더라도, 이름을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치 많은 부자가 30∼40년 새 폭발적으로 늘었다.

흑인 등 유색인종 그리고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지만 부자들의 욕망은 돈이 불어나는 속도를 앞질렀다. ‘그들의 욕망’은 급기야 중세 유럽의 군주처럼 살고 싶은 지경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 왕을 흉내 내 왕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호화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고, 남편과 아내는 부르봉 왕가의 왕과 왕비가 입던 옷을 입었고, 금은보화로 집안을 치장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부르봉 왕가의 유물을 앞 다퉈 사들이고 성의 내부까지 통째로 뜯어다 집안에 옮겨 놓았다. 날마다 파티를 하고 왕가의 자손들처럼 마차 타고 행진하고, 정원에 공작 풀고 호수에 배 띄우며 놀았다. 속 빈 ‘도금시대’의 진풍경이다.

프랑스 서북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루아르 강을 따라 오를레앙, 블루아, 투르 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앙부아즈, 블루아, 샹보르, 슈농소, 위세, 시농 등 중세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 때의 왕가, 귀족들의 호화로운 성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미국의 부자들은 이런 영화를 재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뉴욕 시로 빠져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허드슨 강을 루아르 강 삼아 성과 저택을 지었고, 보통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로드아일랜드 반도의 끝에 있는 뉴포트에는 부자들만의 성을 지어 돈으로 도배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떤 귀부인은 아예 대서양 건너 루아르의 성 옆으로 가서 귀족 흉내를 내며 욕망을 채우다가 죽었다. 허영과 사치와 과시와 공허감이 쌓은 바벨탑이다. 지금 우리 시대 가진 자들의 모습이 100여 년 전 이들이 하던 짓을 닮아 가고 있다.

부자들 공익에 관심 가질 때

그런데 하나 차이가 있다. 당시 미국 부자들은 그래도 많은 대학과 병원, 학교, 공공도서관, 교향악단, 공연장, 박물관 등에 기부해 보통사람도 문화를 향유하고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고, 공익재단을 설립해 공공정책을 개발하고 인재 키우는 일을 지원하여 오늘날 미국이 있게 된 바탕을 까는 데 미력이나마 도왔다.

한국의 부자들도 이제 헛된 도배질 그만두고 공익재단을 만들고, 문화시설에 투자해 미래 대한민국을 멋있게 업그레이드할 두뇌집단인 싱크탱크를 만드는 데 앞장설 때가 됐다고 본다.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면 정치인을 안주 삼아 냉소하며 야유나 보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쓰며 대한민국의 초석을 까는 일에 나서야 한다.

정종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헌법학 jsch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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