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미국이 가야할 길

  • 입력 2007년 3월 8일 03시 00분


허탈했다. 김장수 국방부 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워싱턴에서 ‘2012년 4월 17일부로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이양하기로 합의’한 지난달 24일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이 소식을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인은 “드디어 홀로 서야 할 때가 왔다”며 난리인데 미국인은 왜 이리 냉담한가. 세계 전략 차원에서 해외 주둔 미군을 재편하는 마당에 한국군 전시작전권을 원래 소유자인 한국에 넘겨주는 국지적 문제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인가. ‘한국은 미국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나라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미국은 아쉽지만 한국은 속이 탄다

더 어이없는 것은 전시작전권 이양 시기가 3년 연기된 배경이다. 2009년이 2012년으로 변한 결정적 요인은 미국 각료 한 명의 교체였다. 국방장관이 도널드 럼즈펠드에서 게이츠로 바뀌자마자 미국은 불과 4개월 전의 고집을 꺾고 한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한국에는 중요하지만 미국인은 별 관심이 없는 문제여서 푸대접을 받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미 하원 증언도 큰 뉴스였다. 한국 할머니뿐 아니라 백인인 네덜란드 할머니까지 증언에 나서 미 하원을 숙연하게 만들어도 미 언론은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이 딕 체니 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기지 방문 사실을 알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윤장호 하사가 폭탄테러의 희생자가 된 것도 미국의 한국 무시와 관련이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가 한반도에 초래할 파장은 전시작전권 이양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결정적인 정책이 오로지 미국의 선택에 달려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뼈저린 경험을 했다. 클린턴의 회고를 들어 보자. “나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 종식을 포기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북한에 다녀온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내가 북한에 가기만 하면 미사일 종식에 관한 합의를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도 다음 단계를 취하고 싶었지만 중동의 평화 해결에 근접한 시점에 지구를 반 바퀴 돌아가는 모험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아라파트가 평화협정 체결을 갈망하고 있다며 가지 말라고 애원해서 더욱 그랬다.”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

2000년 12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전념하기 위해 평양 방문을 포기하는 바람에 결국 북한 문제도, 중동 문제도 풀지 못한 회한을 클린턴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북한의 2인자인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미 관계 개선의 호기가 마련된 시점이지만 미국 대통령은 중동 평화를 위해 한반도 평화를 포기했다. 올브라이트도 퇴임 전날 통화에서 클린턴이 “중동 문제에 마지막 힘을 기울이느라 워싱턴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북한에 갈 기회를 잡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지요”라며 아쉬워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미국인은 아쉬운 정도지만 한국인은 속이 탄다. 그때 미국과 북한이 관계 개선을 했다면….

이번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그래도 다시 기회가 왔다. 취임 6년 동안 북한과의 양자 협상을 거부하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드디어 생각을 바꿨다. 두 번째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 상징적인 성공이 절실한 그에게 새로운 카드로 선택된 것이 북한이다. 그렇지만 부시의 최대 고민은 여전히 이라크다. 북한과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라크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왕 시작했으니 부시는 클린턴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한반도의 미래가 타국의 손에서 결정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도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야 한다. 북한을 미국의 외교 현안 리스트 꼭대기에 머물게 하는 것, 한국이 해야 할 최소한의 노력이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