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미니기업가다]<17>호주 ‘로핀’

  • 입력 2007년 3월 2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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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에서도 맹활약 지난달 호주 로핀 본사에서 이 회사의 해드리언 프래벌 사장(왼쪽 사진의 왼쪽)과 캄보디아 출신 엔지니어 데이비드 웡이 조립이 끝난 완제품 ‘폴리라이트’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미국의 인기 드라마 ‘CSI’의 한 장면. 수사관 역할의 배우들이 ‘폴리라이트’로 침대 위에서 범인이 남긴 흔적을 찾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TV드라마에서도 맹활약
지난달 호주 로핀 본사에서 이 회사의 해드리언 프래벌 사장(왼쪽 사진의 왼쪽)과 캄보디아 출신 엔지니어 데이비드 웡이 조립이 끝난 완제품 ‘폴리라이트’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미국의 인기 드라마 ‘CSI’의 한 장면. 수사관 역할의 배우들이 ‘폴리라이트’로 침대 위에서 범인이 남긴 흔적을 찾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폴리라이트’로 침구를 비추자 나타난 얼룩. 사진 제공 알트라이트
‘폴리라이트’로 침구를 비추자 나타난 얼룩. 사진 제공 알트라이트

[연재]세계 최강 미니기업을 가다
- <1> 네덜란드 ‘가초미터’
- <2> 보청리 제조 덴마크 ‘오티콘’
- <3> 욕실매트제조 체코 ‘그룬트’
- <4> 요트제조 네덜란드 ‘로얄 하위스만’
- <5>‘마사이 신발’ 만드는 MBT
- <6> 덴마크 ‘포스’
- <7> 오스트리아 ‘프레크벤티스’
- <8> 기상관측기 만드는 ‘바이살라’
- <9> 자동화 로봇 스위스 ‘귀델’
- <10> 벨기에 아이코스비전
- <11> ‘통증 없는 주사기’ 오카노공업
- <13> 특수 컨베이어벨트 ‘HYC’
- <13> 치즈가공기업 호주 ‘베가치즈’
- <14> 초소형 베어링 ‘북일본정기’
- <15> ‘캐봇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 <16> 대만 ‘탑파워’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과 첨단 수사장비로 무장한 경찰의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 컴퓨터과학수사대(CSI). 이 드라마에서 사건이 미궁에 빠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과학수사장비가 있다. 수사관들은 소형 영사기 모양의 장비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범행 현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잡아낸다. 이 기기는 호주의 중소기업 로핀이 제작한 감식장비 ‘폴리라이트’.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 영국 경찰청, 호주 연방경찰 등 세계 77개국의 경찰과 정보기관 등이 이 제품을 실제로 쓰고 있다.》








○소형차 1대보다 비싼 첨단 감식장비

지난달 호주 멜버른 근교의 로핀 본사를 찾았다. 이 회사의 해드리언 프래벌 사장이 과학수사 장비인 ‘폴리라이트 PL500’의 전원을 켰다. 본체에 달린 2m 길이의 호스 모양의 라이트가이드 끝으로 강한 파란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 빛을 받자 말끔하게만 보이던 프래벌 사장의 바지에 지저분한 얼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범죄 용의자였다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는 흔적이다.

프래벌 사장이 스위치를 조작하자 서로 다른 파장을 가진 녹색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등의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처럼 특정 파장의 빛에 반사되는 혈흔, 지문, 타액, 발자국, 화약 등의 흔적을 찾아내는 게 이 기계의 원리. 강력한 조명이 설치된 나이트클럽에서 특정 색깔의 옷이나 세제 얼룩이 유난히 잘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폴리라이트 PL500’의 대당 가격은 2000만 원대. 한국산 소형차 1대보다 비싼 값이지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범죄 흔적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세계 각국의 수사기관이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찰청과 국방부에 2대가 수입됐다.

○20여 개 초(超)미니기업과의 전략적 제휴가 경쟁력

공장 내부는 평범한 사무실에 더 가까웠다. 떠들썩한 생산라인도 없었다. 직원 몇몇이 칸막이가 쳐진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부품을 검사하거나 조립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임직원은 영업 인력을 합해 모두 20명. 주력 제품인 ‘폴리라이트’ 등의 광원(光源)을 이용한 과학수사장비를 생산해 지난해 560만 호주달러(약 42억 원)의 매출액과 130만 호주달러(약 10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의 과학수사연구소 건설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지난해 매출규모가 줄었지만 연간 매출액은 1000만∼1500만 호주달러(약 74억∼111억 원)에 이른다는 게 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회사는 2005년 호주 정부와 업계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호주 수출상(중소제조기업부문)도 탔다. 해외 수출이 연 매출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직원 20명의 미니기업이 세계 77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비결은 직원 1∼3명의 초미니기업 20여 곳과의 전략적 제휴에 있었다. 광학기술 전문가로 구성된 미니기업에 연구개발(R&D)을 의뢰하거나 부품 생산을 맡기는 방식으로 부족한 인력과 기술력을 보완하는 방식이다.

이 회사 직원 메리 주디카 씨는 “전원공급장치(파워서플라이)와 광학 필터 등 핵심 부품만 본사에서 개발한다”며 “미니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전문기술인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인건비와 보험료 등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학(産學) 연대가 성공 비결

호주 대학이 보유한 원천기술을 들여다가 대기업이 관심을 갖지 않는 틈새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이 회사의 전략. 1978년 설립된 로핀은 1980년대 후반 호주국립대(ANU) 연구진이 개발한 광학필터 기술의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광학제품 수입업체에서 과학수사장비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수동으로 조작하는 광학필터를 조작이 간편한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외관도 전자제품처럼 깔끔하게 디자인한 과학수사장비 ‘폴리라이트’를 시장에 내놨다. 강력한 빛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전원공급장치도 세계 표준에 맞춰 독자 개발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액의 20%를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1회성 투자가 아니다. 호주 대학이 확보한 원천기술로 상업화를 추진한 뒤에 다시 대학에 기술을 이전해 제품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대학에는 매출액의 2∼5%를 기술료로 돌려준다.

중소기업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제품 마케팅도 ‘대학과 제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통해 해결했다.

호주 대학의 연구진에 ‘폴리라이트’ 제품을 지원하고 국제학술회의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도록 한 것. 세계적인 전문가들에게 연구에 쓰인 장비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전략이다. 전문가그룹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산학 협력을 바탕으로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핵심 역량인 광학기술을 바탕으로 환경과 의료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과학수사장비 시장은 규모가 작은 데다 마진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호주 대학의 연구진이 개발한 원천기술을 응용해 빛을 이용한 폐(廢)플라스틱 병 자동 분류설비를 개발했다. 빛을 쪼여 플라스틱의 성분과 오염 정도를 자동 분류하는 방식이다. 시간당 처리 속도를 0.8t에서 6t으로 개선해 상업화에 성공했다.

프래벌 사장은 “의료용 레이저 시장 진출도 추진 중”이라며 “환경과 의료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해 향후 5년 내 연간 매출 2000만 호주달러(약 148억 원)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멜버른=박 용 기자 parky@donga.com

■초미니 ‘다국적’ 기업

“기술만 있다면…” 이민자 대거 뽑아 인력난 해소

지난달 호주 로핀 본사. 이 회사의 직원 데이비드 웡이 컴퓨터 모니터의 수치를 확인하며 최종 조립된 ‘폴리라이트’ 제품의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그는 캄보디아 출신 이민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회사에는 영국, 미국, 에티오피아, 구 유고슬라비아 등의 이민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채용 정책과 탄력적인 인사 관리로 인력난을 해결하고 있다. 회사를 방문한 시간이 오전 10시 무렵이었지만 빈 자리가 꽤 눈에 띄었다.

“히 이즈 언 일레븐 어클락 가이(He is an eleven o'clock guy·11시에 출근하는 친구입니다)”

이 회사의 해드리언 프래벌 사장이 연구개발(R&D) 부서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늘 밤 12시까지 남아서 일하고 지각하는 직원에게 아예 오전 11시에 출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프래벌 사장은 “기술력과 창의력을 가진 직원을 배려하기 위해 원하는 시간을 선택해 일할 수 있도록 탄력적인 근무 지침을 마련했다”며 “기술력만 있다면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호주의 기술 인력난은 심각하다. 최근 호주의 한 조사기관이 호주 기업인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4분의 3이 ‘숙련된 근로자의 부족’을 사업의 최대 장애물로 꼽았다.

호주 내에서 2010년까지 10만 명의 숙련 노동자의 추가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호주 정부는 앞으로 4년간 직업훈련 분야에 108억 호주달러(약 8조 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KOTRA 박봉석 멜버른 무역관장은 “호주 기업의 인력난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라며 “한국의 기술인력 양성 노하우를 호주에 전해 주고, 대신 현직에서 은퇴한 국내 기술 인력의 호주 진출을 지원하는 양국 간 협력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멜버른=박 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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