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불러 뽕’을 아시나요

  • 입력 2007년 2월 22일 19시 45분


사정의 칼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던 김영삼 정부 초중반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나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조사실은 늘 불야성을 이뤘다. 한때 내로라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실력자들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까지 심야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뇌물 수수 사실을 끝까지 발뺌하는 어느 고위 공직자를 상대로 밤샘 조사를 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으며 벼락이 치자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고 호통을 쳐 자백을 받아냈다는 어느 검사의 얘기는 영웅담처럼 회자됐다. 국민 정서 역시 ‘주리를 틀어서라도’ 지긋지긋한 권력형 부패의 사슬만큼은 끊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조사를 받는 쪽이나, 조사를 하는 쪽이나, 이를 지켜보는 쪽이나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밤샘 수사의 관행은 2002년 말에 전면 금지됐다.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이 발생하면서 인권보호 수사준칙을 시행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 이후 검사가 피의자나 참고인을 상대로 밤 12시 이후에 밤샘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동의와 검사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밀실에서의 밤샘 수사가 가혹행위로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고, 밤샘 조사 자체도 가혹행위의 일종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게 채 5년도 되지 않은 셈이다.

지금 검찰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구시대적 조사 관행의 하나는 ‘불러 뽕’이다. 구치소에 구속돼 있는 피의자를 아침 일찍 검사실로 불러내 놓고는 아예 조사를 하지 않은 채 검찰청 내의 구치감에 방치해 압박을 가하는 수사 방법이다.

자백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의자에게 대놓고 가혹행위를 할 수는 없으니 “한번 버텨 보려면 버텨 보라”는 식의 ‘편법 징벌’인 셈이다.

하루 종일 퀴퀴한 냄새가 나는 구치감에서 수갑을 찬 채 멍하게 시간을 죽이는 일을 며칠 계속 당하고 나면 심한 모욕감과 함께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진다는 게 불러 뽕을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다. 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와는 달리 가족의 면회가 어려워지는 데다 한겨울이나 찜통더위에 불러 뽕을 당하면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예전에는 피의자 조사의 필수과목으로 여겨졌던 불러 뽕도 요즘은 쉽지 않다. 피의자들이 “내가 검사님에게 눈도장 찍으러 온 줄 아십니까”라며 구치소로 돌아가겠다고 항의하는 일도 적지 않고, 아예 구치소에서 출두를 거부해 검사가 매일 법원에서 구인장을 발부받아 조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동부지검의 제이유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검사의 피의자 허위진술 강요 의혹 사건은 그러한 점에서 검찰이 거대한 전환기에 서 있음을 보여 준 사건이다. 경험이 부족한 신참 검사의 실수라기보다는 과거 악습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는 “거악(巨惡) 척결이 검찰의 사명인데, 무기가 있어야 수사를 할 것 아니냐”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담장 너머에 있는 과일을 손쉽게 따고 싶은 유혹을 떨쳐야 한다”는 한 검찰 간부의 토로는 이제 엄연한 현실이 돼 있다.

그만큼 수사는 어려워졌고, 전환기의 검찰로서는 생존의 문제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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