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당신의 영웅, 좋은 리더인가

  • 입력 2007년 1월 19일 19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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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 타임지 아시아판은 작년 11월 7일 창간 60주년을 맞아 ‘아시아의 영웅’ 65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한국에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씨, 탈북자 출신인 강철환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공동대표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중국의 덩샤오핑 등과 함께 뽑혔다. 국내 언론도 이를 보도했지만 명단만 싣는 수준이어서 선정 경위나 그 함의(含意)를 알기 어려웠다. 뒤늦게 기사 전문을 찾아보았다. 영웅에 관한 얘기는 결국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에 관한 얘기일 터, 대선을 앞두고 작은 힌트라도 얻고 싶었다.

선임 논설위원 조에르 압둘카림의 총평을 겸한 에세이에 답이 있었다. 그는 지난 60년 동안 아시아는 독립과 식민지 잔재 청산, 공산주의 극복과 경제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들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면서 이 과정에서 박정희, 수하르토, 인디라 간디 등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들을 영웅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했다. 권력의 유혹에 넘어갔거나 독선에 빠져 반대자들을 경멸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한국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해 길게 언급했다. ‘절반의 성공’인 아시아 혁명의 슬픈 상징적 존재가 DJ라는 이유에서다. DJ가 민주투사로서 숱한 투옥과 추방, 납치와 살해 위협을 견뎌 내고 대통령이 된 것은 기념비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기 초반의 개혁과 개방,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의 부패와 타성, 그리고 부도 난 햇볕정책으로 인해 그 역시 영웅의 반열에 올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DJ의 파산한 포용정책이 불량국가 북한의 체제 유지를 돕고 더 담대해지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영웅’에 못 낀 박정희 김대중

이런 리더십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새로운 영웅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영웅들인가. ‘대항(against)’에서 ‘위하여(for)’로 나아갈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영웅들이다. 아시아는 너무 오랫동안 식민주의, 공산주의, 빈곤과 같은 적(敵)들에 ‘대항’해 왔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권력이 아닌 정의를 위하여, 부(富)의 창출뿐 아니라 공정한 분배도 담보하기 위하여, 전통을 존중하되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도 기꺼이 수용하기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영웅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개발독재 시대를 이끌었던 이른바 스트롱멘(strongmen)의 리더십도, 끝내 부패와 ‘민족’이라는 허위의식 속으로 침몰해 버린 사이비 민주화 리더십도 이젠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아니, 이에 관한 논의나마 이뤄지고 있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유력 대선 주자들이 매일 전국을 누비고, 어떤 자리를 가도 선거 얘기뿐이지만 정작 리더십에 관한 성숙한 논의는 찾기 힘들다. 주자들에 대한 인상 비평과 미확인 가십들, 그리고 화자(話者)와의 이런저런 인연에 관한 잡담이 거의 전부다. 이런 수준의 리더십 논의는 마치 교본도 없이 체조의 동작부터 배우는 것과 같다. 최소한 좋은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를 구분할 수 있는 준거의 틀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국가지도자가 되려면 흔히 소명의식, 시대의 흐름을 읽는 역사의식, 균형감각과 판단력, 결단력과 추진력, 책임과 신념의 윤리, 설득력, 도덕성 등을 지녀야 한다는데(대통령과 리더십·김호진·2006), 지금 시대 상황에서 어떤 덕목이 더 절실히 필요한가, 내가 지지하는 인물은 그런 덕목을 지녔는가, 누구든 수없이 자문(自問)해야 한다. 그것이 유권자로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다.

‘나쁜 지도자’가 바른 선택 방해

‘나쁜 지도자’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백지 상태에서 자신만의 바람직한 리더상(像)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볍고 직정적(直情的)인 리더십 스타일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와 대비된다는 고건 전 국무총리에게 마음을 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결국 중도하차하지 않았는가. 호불호를 떠나 임기가 끝나가는 지도자에게 매여 있으면 이성(理性)의 눈으로 좋은 대통령감을 가려 내지 못한다. 올해 리더십 논의의 요체가 또한 여기에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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