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성범죄 보도와 인권

  • 입력 2006년 2월 23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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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미경 소장(특별 초빙), 이지은 최현희 유의선 위원, 김일수 위원장. 이훈구  기자
왼쪽부터 이미경 소장(특별 초빙), 이지은 최현희 유의선 위원, 김일수 위원장. 이훈구 기자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 전국 무대 연쇄 성폭행 등 최근 쏟아지는 성범죄 보도와 관련해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20일 좌담을 열고 성범죄 보도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보도 방향을 짚어 봤다. 김일수(고려대 법대 교수) 위원장과 유의선(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이지은(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최현희(변호사) 위원이 모두 참석했고,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특별 초빙됐다.》

―성범죄를 사실에 대한 보도 이상의 흥밋거리로 다루거나 삽화 만평 등으로 희화화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진단해 주시지요.

▽이미경 소장=성범죄 보도가 대체로 범죄 발생과 피의자 검거 시점에서 끝나는 양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도가 예방과 대책, 성윤리와 의식 등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범행수법의 상세한 묘사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흘러 모방범죄를 부추길 우려마저 있어요. 특히 피해자의 고통과 후유증, 재판 결과 등을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김일수 위원장=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력이나 가족 사항까지 들춰내 가해자의 인격을 과도하게 건드리는 점입니다. 고전적 의미의 인권 개념이지만 가해자 쪽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피해자 쪽의 2차적 피해에 대한 배려가 미흡합니다.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끔찍한 상황 재연과 노출로 악몽을 반복해서 되살리게 만들고 주간지 등의 확대 보도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최현희 위원=운전 중에 낯선 남성 운전자가 차창을 열고 큰소리로 욕을 해대는 경우,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남자가 걸어오는 경우…. 이런 일상적인 일에 여성들이 겪는 불안감도 엄청난데 하물며 성폭행은 그 고통을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것 같습니다. 연쇄 성폭행 피의자를 경찰관들이 이름 붙인 대로 ‘발바리’라고 표현해 본질부터 흐리는 보도 태도를 보면서 정말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의선 위원=피해자가 동료이고 가족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정말 가슴 떨리는 대목입니다. 언론이 성범죄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사회의식도 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80%를 흥미 위주로 보도해 놓고 나머지 20%만 점잖은 표현으로 결론 내는 선정적 표피적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이지은 위원=성범죄를 다루는 언론의 보도 수준이 곧 그 사회 전반의 성의식 수준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은 강조될 수밖에 없겠지요. 재판 결과까지를 추적 보도해 경각심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 소장=남성 중심의 시각도 문제입니다. 가해자가 ‘뿔 달린 사람’이라도 되는 듯 보도해 성폭행의 일상성을 은폐하는가 하면, ‘아내와 금실 좋고 자녀에게 다정한 가장’이라고 소개해 온정주의로 흐르기도 하지요. ‘성폭력의 충격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다’는 식의 ‘상처뿐인 피해자’로 몰아 치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길도 모르면서 택시 운전을 하느냐며 모욕을 주었다”는 연쇄 성폭행 피의자의 말을 인용한 대목에서는 피의자의 범행 동기를 두둔하는 듯한 느낌마저 줍니다.

―성범죄 또는 성 관련 보도를 할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고 무엇이 바람직한 방향인지 짚어 봤으면 합니다.

▽최 위원=사실을 보도하되 끔찍한 현장이나 폭력 수법은 충동적으로 모방하지 않도록 지극히 절제해서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이 품격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을 의식하게 된다면 개선될 수도 있겠지요. ‘황우석 교수 파문’을 지켜보면서 언론 소비자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한 예로 시민단체가 ‘올해 최고의 성범죄보도상’ ‘올해 최악의 성범죄보도상’ 같은 것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이 위원=적지 않은 독자가 말로는 품격 있는 보도를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흥미를 추구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된 독자의 취향을 언론이 지혜롭게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유 위원=겨울방학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현지 신문들을 관찰해 봤습니다. 성범죄가 잦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디에서 성폭행 범죄가 일어났는데 피해 여성의 신고에 의해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고 재판에서 이런 정도의 형량이 예상된다’는 식으로 흥미성은 일절 없이 절제된 내용만 짤막하게 보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어느 국내 정치인이 공개석상에서 여성의 성기를 특정 해산물에 비유한 표현을 썼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 정치인도 문제지만 그 표현을 인용해 비난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흥밋거리 정도로 보도한 언론, 특히 정치인의 책임을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언론 풍토 역시 문제입니다.

▽김 위원장=언론은 보도 태도에 따라 상수도가 될 수도, 하수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독자의 건강을 위해 언론은 마실 수 있는 물을 걸러내는 정수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언론이 잘못된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하수만 쏟아내서는 안 되겠지요.

▽이 소장=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기자들의 품성, 의식도 중요합니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지요.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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