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그들만의 태평성대

  • 입력 2005년 12월 2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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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상화하택(上火下澤)’을 골랐다. 위는 불, 아래는 못처럼 분열과 갈등을 거듭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 정권 사람들더러 고르라고 했다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태평가는 그칠 날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지금 대한민국 국력은 세종 때 다음으로 융성한 세대”라고 말했다. 10월에는 “외교는 초과 달성했다”고, 7월에는 “어느 분야를 보아도 옛날보다 후퇴했거나 위험을 가중시킨 곳은 없다”고 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이달 초 “(현재 한국 사회는) 1988년 이후 구조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가장 안정돼 있다”고 말했다. 10월 유럽 순방길에는 “나라는 이미 반석(盤石) 위에 올라 있다”고 했다.

역시 ‘코드’는 무섭다. 줄줄이 따라 부른다.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은 “우리가 선진국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선진국과 비교해 (아직도 작은 수준인) 우리의 재정 규모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을 이어 갔다. 올 한 해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칭찬 릴레이’ 순번이라도 정해 놓은 듯이 돌아가며 국운(國運)의 융성을 강조하고 노 대통령을 성군(聖君)으로 칭송했다. 지난 일요일 노 대통령 당선 3주년 당-정-청 워크숍도 자화자찬(自畵自讚) 일색이었다.

태평성대의 근본은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다. 경제가 선(善)순환해 다수의 국민이 경제적 불안을 털어 내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등이 시리지 않으려면 안보 불안도 걷혀야 한다. 정치적 안정, 사회적 갈등 완화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정권 사람들만 반석 위에 있어서는 그들만의 태평성대일 뿐이다.

노 대통령과 이 총리는 국민 앞에 당당하게 서서 “여러분, 3년 전보다 살기가 좋아졌습니까, 나빠졌습니까”라고 물어볼 자신이 있는가.

많은 국민의 실질소득은 늘지 않는데 세금은 늘어만 간다. 청년도, 중년도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해 신분 상승이 아니라 신분 격하의 벼랑으로 내몰린다. 정권 측은 마치 반독재 투쟁하듯이 ‘양극화 타도’를 외치지만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전체 가구의 15%가 재산보다 빚이 많거나 재산이 전혀 없다.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에 1위다. 세계은행이 분석한 한국 정부의 경쟁력은 2002년 세계 50위에서 지난해는 60위로 떨어졌다. 정부의 효율성, 부패 방지를 비롯한 법적 정치적 안정, 법치(法治) 수준 등의 지수가 후퇴한 탓이다. 여기에 내 편 네 편 가르기, 과거 들추기 등으로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다. 북한의 핵 위협은 해소되지 않고, 북한 편들기를 둘러싼 남남갈등은 증폭 일로다.

이런데도 태평성대요 선진국이라니, 입 다물고 있는 것보다 더 밉다는 국민이 늘어나는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정권의 잘못을 따지면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고 역공하니, 저런 코드에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국민이 늘어나는 것이다.

정권이 자기 교정(矯正)에 나설 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기 4년차의 변신에 그래도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 보고자 한다. 정권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10년 집권’을 입에 올린대서야 등 돌린 민심을 되돌릴 수 없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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