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가 보는 청계천은 어떤 모습일까

  • 입력 2005년 9월 12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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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가족의 행운과 건강을 비는 다리밟기를 하던 곳으로 서울의 명물이던 광통교가 95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1910년 종로∼남대문 간 전차 선로 복선화 공사로 자취를 감췄던 광통교가 청계천 복원 공사의 일환으로 23일 제 모습을 찾았다. 현재의 복원된 위치는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국관광공사 앞이지만 본래는 약 155m 하류 쪽에 있었다. 사진은 광통교의 1958년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조선시대에 가족의 행운과 건강을 비는 다리밟기를 하던 곳으로 서울의 명물이던 광통교가 95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1910년 종로∼남대문 간 전차 선로 복선화 공사로 자취를 감췄던 광통교가 청계천 복원 공사의 일환으로 23일 제 모습을 찾았다. 현재의 복원된 위치는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국관광공사 앞이지만 본래는 약 155m 하류 쪽에 있었다. 사진은 광통교의 1958년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오늘 밤은 눈빛이 유독 밝고 밝아/사람마다 광통교에서 달을 기다린다/노래하는 아이들 한 떼가 옷깃을 연이어/함께 동방의 행락조(行樂調)를 부르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한시 '상원곡'(上元曲)의 일부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청계천 광교 옆에 모여 든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해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은 조선 개국 이후 500년 역사를 지켜본 하천이다. 조선시대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엔 문반(文班)이, 남촌엔 무반(武班)이 모여 살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충무로 일대를 개발했으나 청계천변은 북촌과 남촌의 완충지대로 서울 보통시민이 고단한 삶을 꾸려 온 생존의 현장이었다. 조선시대 부자들도, 다방골 기생들도, 다리 밑 거지들도, 공장의 '시다'들도 청계천 안에 저 마다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삶이 있으면 시가 있고 노래가 있고 그림이 있기 마련. 예로부터 청계천은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보고(寶庫)였다. 길지는 않지만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이 하천에서 소설가 시인 화가들은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조선시대엔 청계천의 활기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한 글과 그림이 풍성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은 1739년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청계천 주변의 장관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청풍계'(淸風溪)를 그렸다. 그는 이 일대가 '골이 깊고 그윽하며 물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청계천 문학이나 그림은 천변의 음울한 풍경에 주목했다. 청계천변을 중심으로 1930년대 서울 중산층과 하층민 삶의 애환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 '천변풍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이월에 대독이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는 시리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현대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요, 세태소설의 진수라 평가받는 이 소설은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1936~37년 월간지 '조광'에 연재한 것으로 빨래터 아낙들, 천변의 노름판과 이발소, 인력거 등의 묘사가 마치 당시의 청계천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듯 하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 구보(실은 박태원)씨가 집을 나서서 걸어가는 길도 청계천변이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 마디 '네-'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난민 수용소'처럼 변했다. 전쟁의 북새통 속에 모여든 난민들이 천변에 누더기 같은 판잣집과 움막을 지었다. 6·25를 서울에서 겪은 소설가 김원일은 당시를 회고하는 칼럼에서 '그 해 여름 엄마를 따라 식용품을 구하러 수다리 부근 난전(亂廛)에 나갔다가 시체 몇 구가 쓰레기 더미 하천 바닥에 버려진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썼다.

김성환 화백이 그린 1958년 어느 날 서울 청계천의 풍경. 천변에 늘어선 위태로워 보이는 판잣집이 당시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 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시사만화 '고바우'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이 그린 1958년의 청계천 풍경에는 빈대떡집과 사창가, 천변 사람들과 행인들이 마치 조선시대 풍속화처럼 해학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가슴이 드러나는 저고리를 입고 빨랫감을 머리에 인채 천변으로 가는 아낙, 더러운 것도 아랑곳 없이 물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영화 '하녀' 포스터가 붙은 판잣집 허름한 벽, 전쟁고아와 상이군인 등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따뜻하다.

일본의 대표적 보도 사진작가인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68)는 60년대 청계천의 모습을 낱낱이 앵글에 담았다. 천변의 목조 가설물 위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그 아래에서 물장난하는 아이들, 3층짜리 수상(水上) 판잣집 난간에 나와 가족들과 함께 웃으면서 양치질하는 사람, 판잣집 난간에서 청계천으로 오물을 버리는 주부, 천변 골목길 미장원 앞의 한껏 멋을 낸 아가씨…. 사진 속 판자촌은 가난함과 누추함으로 가득했지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가 밝다. 그래서 정겹고 애틋하다.

그러나 사실 이 때의 청계천은 서울이란 급팽창하는 도시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수백만 인구가 배출하는 각종 오물이 흘러들어 사계절 내내 악취가 풍겼고 각종 전염병균의 소굴이었다. 하천가에는 화장실도 따로 없는 판자집과 가짜 물건, 싸구려 물건을 파는 너절한 상점이 널려있었다. 차라리 하천을 덮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시로선 당연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청계천 복개(覆蓋)공사는 1958년부터 1977년까지 20년간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재건과 성장이란 깃발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모두 '덮고' 넘어간 세월이었다.

이 시절 청계천은 '근대'와 '도시'가 맞부딪쳤을때 삶의 풍경이 얼마나 가파르게 왜곡돼가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청계피복노동자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육신을 태운 것도 그즈음이었다. 소설가 박태순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사건 상황을 현장 취재해 르포를 썼다.(여성동아 70년 12월호)

다시 숨쉬는 청계천.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 거리를 시인들은 때로 한숨에 젖어, 때로 쓸쓸함에 잠겨 걸었다.

'퇴계로에서 을지로를 지나고 청계천을 걸어가는 동안/중부시장 행상인들이 잡아 당기는 밧줄,/오늘따라 무인도가 유달리 바다 위로 치솟아 보였다/눈마저 내리지 않는 외롭고 캄캄한 날/인파의 물살을 허우적이며/퇴계로에서 을지로로 노를 젓는 동안/내 돛대위에 흐느끼던 깃발은 가만히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무인도는 점점 커다랗게 떠올라와 있었다.'(이하 생략)(김종해·金鍾海 '무인도를 위하여' 1991년)

80년대후반, 90년대들어 민주화시대가 열리고 경제적 풍요가 서울을 덮었지만 청계천은 여전히 꽉막히고 뒤틀린 대도시의 신음 소리가 묻히는 곳이었다.

'청계천 평화시장 앞,/지천으로 깔린 평화,/철지나 시세잃은 평화,/전품목 바겐세일 80%!/아직은,/공(공)이 아니다/…/아가씨, 평화 백원어치만 줘 봐요.'(이준후 '아우라지, 추억에 대하여', 1999)

새로운 세대가 보는 청계천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개발의 뒤안길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은 그곳에서 낭만을 찾았다. 청계 5, 6가, 8가까지 이어졌던 200여 개 헌책방에는 없는 책들이 없어 수많은 문학청년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소설가 김영현이 입대하는 친구와 함께 밤새 술을 마시고 사이렌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텅빈 거리를 소리치며 걸어가다 경찰에게 붙들린 곳도 청계천이었다. 전국에서 중고 LP 음반들이 모이는 곳도 이 곳이었고 함지박, 다리미, 떡살, 다식 판, 꽹과리, 반닫이 등 없는게 없었던 황학동 벼룩시장도 이곳에 있었다.

이제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른다. 새로운 세대가 보는 청계천은 어떤 모습일까.

2003년 7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물 위를 걷는 사람들-청계천 프로젝트' 전은 세대별로 다양한 미술인 42명의 작품이 청계천을 코드로 한자리에 모인 기회였다. 허름한 판잣집이 가득했던 옛 청계천을 체험한 원로부터 청계고가도로만으로 청계천을 떠올리는 20대까지, 청계천에 대한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은 '각자의 청계천'을 추억하며 생태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날 청계천의 새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세대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들은 새로운 청계천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아름다운 거리에/오고가는 사람들 흥겹게 노래한다/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 웃음꽃 피우네….'

국민가수 조용필이 작사 작곡한 '청계천'의 가사처럼 이제 청계천은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공간이 된다. 수백년간 도시생활의 찌꺼기를 실어 나르다 만신창이가 되어 끝내 콘크리트 아래로 버림받았던 청계천이 다시 생명의 숨길을 내뿜고 있다. 청계천을 사색의 공간, 발랄한 문화의 향기가 넘쳐나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허문명기자 ang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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