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4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2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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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 항우가 초군(楚軍) 주력을 이끌고 다시 양(梁) 땅으로 내려갔다는 소문은 오래잖아 한왕 유방의 귀에도 들어왔다. 하수(河水) 가에 진채를 내리고 굳게 지키기만 하던 한왕은 조구와 종리매가 많지 않은 군사로 성고와 형양 두 성을 지키기만 한다는 말을 듣자 슬며시 마음이 변했다.

“조구와 종리매가 성안에 틀어박혀 지키기만 한다면 성고와 형양 사이는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틈에 우리도 서쪽으로 가서 낙양과 공현(鞏縣)에 있는 군사들과 합치는 게 어떤가? 그러면 항왕의 대군이 다시 성고로 돌아온다 해도 겁날 것이 없다. 설령 싸움에 다시 밀린다 해도, 물러나 지키기만 하려 들면 그들이 관중으로 밀고 드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한왕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렇게 물었다. 곧 형양과 성고를 버리고 낙양과 공현을 잇는 선으로 물러나자는 말이었다. 낭중(郎中) 정충의 계책에 따라 누벽을 높이고 참호를 깊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여러 날이 되니 좀이 쑤신 듯했다. 거기다가 성고와 형양 부근에서 한왕이 워낙 여러 번 험한 꼴을 본 터라 그 땅에 정나미가 떨어진 탓도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역이기가 펄쩍 뛰듯 일어나 말했다.

“신이 듣기로 ‘하늘이 하늘인 까닭을 아는 사람이라야 왕업을 이룰 수 있다(지천지천자 왕사가성·知天之天者 王事可成)’고 하였습니다. 무릇 왕 노릇을 하려는 이는 백성을 하늘로 여기나,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기고 있습니다(왕자이민위천 이민이식위천·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저 오창은 오래전부터 천하의 물산(物産)이 모였다 나눠지는(전수·轉輸) 곳으로서, 신이 듣기로는 그곳에 엄청난 곡식이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그토록 어렵게 형양과 성고를 우려 빼고도 그 오창을 굳게 지킬 줄 모릅니다. 오히려 대군은 동쪽으로 빼돌리고, 군사를 나누어 성고와 형양을 지키게 하면서도 오창에는 죄수와 부로(부虜)들을 보낸 것은 하늘이 우리 한나라를 돕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아두고 되레 물러나 스스로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를 내던지고 있습니다. 신이 가만히 헤아리기에 이는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두 영웅이 언제까지 함께 나란히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오래 서로 맞서 노려보기만 하고 결판을 내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흔들리고 들끓으며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베 짜는 여인은 베틀에서 내려올 것이니, 천하의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서둘러 군사를 내시어 형양을 거두시고 오창의 곡식을 차지하십시오. 성고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고 태항(太行)으로 가는 길을 끊으며, 비호(蜚狐)의 입구를 막고 백마(白馬) 나루를 지켜, 제후들에게 형세를 어느 편이 제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면 천하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약하게 물러나려던 마음을 거두고 역이기의 말을 따랐다. 낙양으로 가는 대신 오히려 주발과 역상의 군사들을 동쪽으로 불러내어 세력을 형양 성고 쪽으로 모아들였다. 장량과 진평이 다시 한왕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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