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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5월 2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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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말자 신민당, 쟁취하자 민중정권.”(노동자)
“미제놈들 몰아내자.”(대학생)
1986년 5월 3일 인천에 휘날린 깃발들은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모였건만 칼끝은 서로 다른 곳을 겨누고 있었다.
불씨는 신민당이 벌인 직선제 개헌요구 범국민 서명대회였다. 재야 정치인들의 모임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통일 운동가 주축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이들과 보조를 맞췄다.
노동운동 세력도 반정부 대열에 합류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등으로 조직화된 이들은 민족민중민주헌법(삼민헌법) 쟁취를 내걸고 과격시위를 주도했다. 한편 ‘80년 광주’의 비극을 미국의 책략으로 해석한 대학생들은 반미투쟁의 선봉에 섰다.
수도권 첫 대회장인 인천은 모두에게 승부처였다. 그런데 대회 닷새 전 서울대생 두 명이 반미를 외치며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학생들은 분노했고 그 불똥이 인천으로 튈 것은 분명했다.
다음날 이민우 신민당 총재,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문익환 민통련 상임의장은 학생들의 좌경 과격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에 서노련과 학생들은 “정권과 타협하려 한다”며 이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서명대회는 결국 무산됐다. 대회장 주변에서 5000여 명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그나마 과격파와 대화가 통할 것이라며 중재에 나섰던 민통련은 되레 이들에게 집회 장소를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시위대는 ‘해방구’를 선언했다.
한나절 해방구의 후유증은 컸다. 정부는 129명을 구속했고 관련단체 수사에 나섰다. 전국 대학가에는 운동권 수배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쓰라린 것은 민주화 운동세력에 ‘급진 폭력’이라는 딱지가 붙어 국민들과 멀어지게 된 일이었다.
인천 5·3사태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반정부 시위였지만 관념적 급진주의 탓에 ‘항쟁’이 아닌 ‘사태’로 기억되고 있다. 국민들은 이듬해 박종철 이한열 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시위에 동참한다. 두 청춘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5·3사태의 과오에 대한 씻김굿이나 다름없었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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