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그는 국전(國展)에서 낙선한 적도 있었고 6·25전쟁 통에는 미군 피엑스(PX·매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간신히 생계를 이을 정도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裸木)’은 당시의 박수근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당시 피엑스의 경리였다. 작품 내용에 비춰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을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지만 화가에게는 이미 ‘참한 부인’이 있었고 작가는 따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생시에 호당 5000원에 불과했던 그의 작품은 현재 엽서 크기 한 점이 1억 원 이상을 호가한다. 엊그제 한 국내 경매에서 그의 3호 크기 ‘노상(路上)’이 근현대 미술작품으로는 최고가인 5억2000만 원에 팔렸다. 1980년대 그의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한국의 화상(畵商)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자택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월간 ‘신동아’ 2월호는 박 화백의 장남과 장손이 호주 시드니에서 3대째 화가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위대한 예술가의 자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박수근’이란 이름 석자는 그들의 자랑이자 멍에였다. 거목(巨木) 아래서는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들과 손자에게는 박 화백의 작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유작(遺作)을 팔아 생활비와 학비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벌거벗은 나무들에 옷을 입혀 주고 싶다”고 했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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