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春園이 복권될 날은 언제…

  • 입력 2004년 11월 26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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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 서울에 내린 첫눈을 보셨나요. 한 해가 막바지에 접어드는 신호지요. 아직도 첫눈은 이 땅 젊은이들의 첫사랑, 겨울연가인가요. 한류(韓流)따라 춤추는 이웃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한국 연인들의 겨울소나타 반주자가 첫눈이라고 하더군요. 첫사랑, 나이에 무관하게 가슴 설레게 하는 추억의 열쇠이겠지요.

‘갑오개혁 이후에 첫사랑의 가슴앓이 하지 않은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다.’ ‘첫사랑은 깨져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결혼이 불행해진다.’ 천하의 명구들도 못다 그린 첫사랑, 그것은 한 세기 전에 배를 타고 이 땅에 상륙한 근대의 상징이 아닐까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내 사춘기의 경전이었지요.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을, 그 독을 두려워해라.’ 그 유명한 아버지의 경구의 뜻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깨칠 듯 말 듯하지만. 사내 가슴에 상처를 주도록 훈련받은 찰스 디킨스의 ‘거창한 꿈’(흔히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되는)의 여주인공 에스텔라도 연모와 절망의 대상이었지요.

일본어 세대로부터 전승받은 구라타 햐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도 사춘기의 통과의례였고요. 중학교 시절 나도 이성에게 편지를 썼지요. 첫 상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영화 ‘흑기사’를 보고 여러 날을 앓고 난 후였어요. 내 짧은 영어실력에 분노했고, 답장을 받지 못해 절망했지요. 한참 후에 세상을 흔든 그녀의 불륜(?) 소식에 마침내 체념했지요.

내가 그 당돌하고 허황된 편지를 쓸 용기를 낸 것은 오로지 대문호, 춘원 이광수의 음덕이라고 믿습니다. ‘무정’(1917년)이야말로 이 땅에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봉홧불이 아니었을까요?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영어교사 이형식,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김 장로의 딸 선형,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 기생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박영채. 이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새 나라의 건설이었지요.

형식의 말대로 황금도 지식도 기독교 내의 단단한 지위,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도, 지식 과학 문명의 배양을 통해 근대사회의 건설에 주된 역군이 될 수 있다. 기생 계월향에게도 강한 정조관념이 펄펄 살아 있다. 한 걸음 더 나가자. 그까짓 처녀막이 사라진들 대수랴?

1917년, 그 캄캄하던 시절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선각자, 춘원이 아니었던가요? 이광수 이후 실로 무수한 이 땅의 문인들이 조국을, 시대를, 삶을, 그리고 사랑을 붙들어 원고지에 옮겼지요. 심장의 피를 찍어 쓴 사람도, 입술의 침으로 쓴 사람도 많았지요.

수많은 문학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정 작가도 여러 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지요. 그런데 정작 이 땅에 근대라는 찬란한 불꽃을 지폈던 춘원 이광수의 이름으로 제정된 문학상은 왜 하나 없나요? 만년의 그의 과(過)로 찬란했던 평생의 공(功)을 깡그리 덮어 버렸기 때문인가요?

정이현 작가, 첫눈 오는 날, 누굴 생각하는지요? 언제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썼는지요? 아직도 가슴이 저린가요? 나는 언젠가 춘원문학상이 제정되어 정 작가가 그 상을 탔으면 합니다. 그때 나는 다른 편지를 쓰고 있겠지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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