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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10일 21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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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문서를 손에 든 독일 대표단의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4년 동안 인구 6000만명 중 1100만명이 전쟁에 동원됐고, 17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2주 전인 10월 29일에는 해군 수병들이 ‘개죽음하기 싫다’며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최대의 군항인 킬 항구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1월 9일, 총리 막스 폰 바덴은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자리를 넘겼다. 항복을 위한 협상에는 불과 이틀이 소요됐다.
콩피에뉴 숲 한가운데는 기관이 꺼진 열차가 서 있었다. 오전 5시, 프랑스와 독일 대표는 그 열차 안에서 문서에 서명했다. ‘11월 11일 오전 11시부로 상호간 군사적 적대행위를 종료함….’ 6시간 뒤, 전(全) 전선에서 총성이 멎었다.
병사들은 상대편 참호에서 인간의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도 걸어 나갔다. “이제 집에 가자.”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병사들도 서로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증유의 살육을 경험한 유럽 대륙은 여전히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특히 독일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전쟁 중인 조국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비난했다. 맥주홀에서 침을 튀기며 ‘사회주의자 배신론’을 외치던 이들 중에는 전쟁 중 제1급 철십자장(章)을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도 끼어 있었다.
‘배신자’에 대한 혐오는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이 1320억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부과하면서 극에 이르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사회민주당과 가톨릭계 중도 정당들은 나란히 표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민심은 공산당과 나치당의 두 극단으로 쏠렸다.
제1차 세계대전 항복 문서가 조인된 지 15년 뒤인 1933년, 히틀러는 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7년이 더 흐른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6월 22일, 프랑스 대표단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파리 근교 콩피에뉴 숲에 세워진 열차. 1918년 11월 11일과 동일한 장소였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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