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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18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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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구분이 적대감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이름이라는 것이 묘해서 한번 주어지면 구성원들을 그 이름으로 묶어버린다. 자신이 진보인지도 몰랐던 사람이 ‘진보’라고 불러주니까 갑자기 골수 진보가 돼 보수를 겨냥하고 나서는 식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 수많은 층위(層位)가 존재하지만 우리 정서가 본디 회색은 좋아하지 않아서 양극단으로만 쏠린다.
열린 보수, 중도 보수, 온건 진보, 중도 진보 등 수식어를 붙여 봐도 대결적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라는 말에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자의든 타의든 편이 갈려 싸웠던 기억들이 생생해 좀처럼 화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이비 보수와 진보도 나온다. 이런 덫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을까.
미국 NBC방송의 시사토론 진행자 크리스 매튜스는 보수적인 미 공화당을 ‘아빠당(Daddy Party)’으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을 ‘엄마당(Mommy Party)’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함의와 재치가 넘친다. 조지 W 부시와 빌 클린턴을 비교해 보라.
‘아빠당’은 묵직하고 스케일이 크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 궁극적 목표다. 분배보다는 성장이 중요하고, 정부는 작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책임 하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옳다고 믿으면 밀고 나간다. 결과로서 말할 뿐이다. 사춘기 아들이 가출해도 별 말이 없는 아버지를 그려보라. 몰래 눈물 흘릴지언정 내색은 않는다. 아빠는 집안의 기둥이므로.
‘엄마당’은 자상하고 세심하다. 부국강병도 좋지만 우선 식구들이 두루 굶지 않아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잘난 자식 못난 자식 똑같이 소중하다. 당연히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다. 정부도 웬만큼 커야 한다. 아이들에게 자기책임 하에 살아가라고 하기엔 세상이 구조적으로 각박하다. 엄마가 감싸지 않으면 누가 감쌀까.
아빠와 엄마를 우리 정당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정체성부터 선명해질 것이다. 보수, 진보 대신 아빠 같은 당, 엄마 같은 당이 될 터이니 당의 지향점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싸울 일도 많지 않아서 굳이 상생(相生)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혼할 작정이 아니라면 누가 으르렁거리겠는가.
탄핵 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은 상생의 정치를 약속했다. 잘 지켜질지 두고 봐야겠지만 진정한 상생이 되려면 각 당에 붙은 보수, 진보 딱지부터 떼어내야 한다. 적의(敵意)의 깃발 아래서 말로만 “잘해 봅시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될 수 있을 때 상생은 이루어진다. 마침 여야 당 대표도 남자와 여자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엄마당’을 맡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아빠당’을 이끈다면 금상첨화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따로 있겠는가.
이재호 논설위원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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