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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20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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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21일.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 구엔 반 티우. 그는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미군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싣는다.
티우를 수행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금괴 2t을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그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앞서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이름을 남긴다.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써 스스로 식민주의 사슬을 끊은 게 1954년. 미국이 프랑스 대신 베트남에 끼어든 게 그 즈음이다.
티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국의 존슨과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도 티우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만은 어쩌지 못했으니.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됐다.
그것은 ‘미국의 세기’라는 20세기의 일대 치욕이었다. 5만8000여명의 미국인과 수백만 명의 베트남 인민이 희생됐다. 비극적이고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1400만여t의 폭탄을 퍼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세계전선에서 뿌린 양의 2배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의 최대 딜레마는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로 도덕성의 승리였다.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인민들이 습기 찬 정글에서 감자와 밀떡을 먹으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때, 남베트남의 고관들과 미군장성들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서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으니!
역사는 이따금 소극(笑劇)을 연출한다던가.
미국으로 망명했던 전 남베트남 부통령 구엔 카오 키가 최근 조국 땅을 밟았다. 티우와 짝을 이뤘던 열혈 반공투사는 이런 ‘전향서’를 냈다.
“베트남전은 외국인들이 펴놓은 멍석 위에서 벌인 동족상잔이었다. 100년 뒤에 그 전쟁을 돌아본다면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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