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종구/‘천막 당사’ 그 다음은?

  • 입력 2004년 3월 24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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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24일 서울 여의도 옛 중소기업전시장 터로 당사를 옮겼다. 국회의사당 앞 지하 6층, 지상 10층 건물 전체를 당사로 써온 지 7년 만의 이사다. 새 당사는 급히 설치한 천막과 컨테이너 몇 개가 전부다.

박근혜(朴槿惠) 대표를 비롯한 당직자들은 이날 아침 ‘한나라당’ 간판을 떼어들고 여의도공원을 지나 천막 당사까지 1km를 침묵 속에 걸어갔다. 이들을 지켜보는 시민들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한 당직자는 “20여분밖에 안 됐지만 마치 20년을 걸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부패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국민에게 속죄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는 설명이다.

열흘 전에는 열린우리당이 똑같은 이사를 했다. 여의도의 최신 인텔리전트 빌딩을 뒤로하고 영등포 농협공판장으로 옮겼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대기업 본사 같은 시설에서 호화 생활을 해 온 주요 정당들이 하루아침에 천막과 공판장으로 내몰릴 만큼 여의도 정가에 부는 바람이 차갑다.

열악한 환경에 당직자들은 불편을 호소한다. “비가 오면 어떡하나” “바람 불면 어떡하나” “화장실도 변변찮은데…”.

천막 당사 한쪽에서는 “이제 당 지지율이 좀 올라갈까, 총선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좀 더 솔직한 고민을 토로하는 얘기도 들렸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정작 넘어야 할 산은 따로 있는 듯했다. 국민의 시선이다. 이날 한나라당의 천막 당사를 지켜보던 회사원 김유석씨(32)는 “동정심을 노린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길 바란다. 앞으로 얼마나 깨끗한 정치를 실천해 나갈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런 시각을 의식했음인지 박근혜 대표는 새 당사에 도착하자마자 “천막으로 옮겼다고 해서 잘못을 용서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겠다.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불신과 부패, 정쟁으로 얼룩진 낡은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박 대표의 말처럼 뼈저린 자기반성과 고민이 전제돼야 한다. 그럴 때 시민들은 비로소 천막과 공판장 당사를 신뢰 어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윤종구 정치부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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