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재호/후궁

  • 입력 2004년 1월 14일 18시 12분


코멘트
조선시대 후궁의 삶은 고단했다. 국왕의 승은을 입어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왕과의 하룻밤을 고대하며 평생을 마쳐야 했다. 왕이 죽으면 재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개 여승이 됐다. 수절하면서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과부 후궁들이 여승이 돼 모여 살던 절까지 있었으니 정업원(定業院)이 그곳이다.

▷한나라당 김정숙 의원이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이 여성 인사 영입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 “지금 후궁 간택하느냐”고 꼬집었다. “왕이 후궁을 간택하듯 이름난 여성을 영입한 뒤 후궁처럼 쓰고 버린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당내 여성 인재들이 즐비한데 새 여자를 찾고 있다”면서 “(새 여자도) 6개월만 되면 헌 여자가 된다”고 했다. 남성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면 여성 비하라고 규탄대회가 벌어졌을 텐데 여성 의원이 한 말이어서 어떨지 모르겠다.

▷여성 인사 영입 경쟁을 보는 여성계의 눈도 곱지는 않을 것이다. 양성평등운동에 젊음을 다 바쳤는데 정작 각 당이 찾고 있는 사람은 세상물정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젊고, 방송을 통해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나 제대로 검증은 안 된 인물로 비치니 아무리 금배지 달려고 운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심사가 편치는 않을 터이다. 그렇다고 이를 말리기도 어렵다. 누가 됐든 우선 수를 늘리는 게 급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회의 여성 의원 수는 16명으로 전체 273명의 5.9%다. 세계 181개국 중 104위에 해당될 만큼 적은 수다.

▷능력도 문제다. 영입 케이스로 들어온 여성 의원 치고 홀로서기에 성공해 의정사에 이름 석 자를 남긴 경우는 드물다. 1960년대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고 당시 40대였던 YS, DJ를 끔찍이 아꼈다는 박순천(朴順天) 여사 이후 이렇다할 여성 정치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다행히 연초 한 신문이 실시한 16대 의원 의정 활동 평가에서 여성 의원들이 평점 100점 만점에 74.4점을 받아 73.72점을 받은 남성 의원들보다 앞섰다니 희망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중 몇 의원은 최상위권에 들었다. 설령 후궁처럼 간택된다고 해도 당당히 살아남는 것은 모두 제 하기 나름일 것이다.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