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카다피의 변화

  • 입력 2003년 12월 22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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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21세기에 걸맞은 지도자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과정이 그렇고, 지금까지 무려 34년간 계속된 장기집권도 세계적 조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방세계는 그를 ‘중동의 미친 개’ ‘독불장군’ ‘과대망상증 환자’ ‘변덕쟁이’ 등으로 부르며 손가락질을 해 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정부가 리비아를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불량 국가(rogue state)’로 지목한 배경에는 ‘비정상적 지도자’ 카다피에 대한 미국의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카다피가 느닷없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이라크에 이어 2번째 악의 축이 WMD 전선이 무너진 것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체포로 인한 ‘쇼크’가 원인이 됐든, 경제적 이득을 노린 고육책이 됐든 리비아의 WMD 포기는 반가운 소식이다. 리비아가 택한 길은 이라크 방식보다 훨씬 바람직한 갈등 해소법이어서 더욱 반갑다.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이란도 얼마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수용하기로 했다. 예사롭지 않은 WMD 해결 바람이다.

▷카다피는 집권 이후 극단적인 반(反) 서방, 반 유대정책을 추진하며 서방과 대결해 왔다. 그는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록 테러라는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기는 했으나 행동으로 서방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88년 영국 상공에서 미국의 팬암 여객기를 폭파시켜 탑승자 257명 전원을 숨지게 한 사건이 리비아의 대표적 국가테러다. 로마와 빈의 동시 폭탄테러를 사주했다가 사흘간 미국의 공습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과거의 카다피는 미국과의 대결을 위해 군사적 위협과 경제제재까지 무릅쓴 ‘무모한 지도자’였다.

▷오랫동안 시대착오적 지도자로 평가됐던 카다피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61세가 되어 비로소 철이 들었다는 비아냥조의 평가가 있지만 그를 ‘뿔 달린 지도자’로 매도했던 서방의 일방적 인식에도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다피에게 세계의 변화를 읽는 능력이 없다면 WMD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000년 5월 미 언론과의 회견에서 “오늘의 세계는 어제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리비아도 과거의 리비아가 아니다”며 “집권 이후 전 세계가 급변했으며 나도 그 과정에 부응했다”고 말했다. 심사숙고한 결과이지 한순간의 기행(奇行)은 아닌 것 같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를 모델삼아 핵포기 선언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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