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00>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2월 1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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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더해지는 깃과 날개(4)

"저도 패공께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걸 그 사람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중에 선비의 관[유관]을 쓰고 오는 이가 있으면 큰 소리로 욕을 하고, 그 관을 빼앗아 안에다 오줌을 누어버리기도 한다는 얘기까지 해주었지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막무가내로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패공이 조금 풀린 얼굴로 물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다더냐?”

“역선생[(력,역)生] 이기(食其)는 아는 것이 많고 품은 뜻이 컸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그것들을 마음껏 쓰고 펼칠 수가 없었지요. 세상 밑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떠돌다가 끝내는 급한 의식(衣食)을 해결하고자 성문을 지키는 낮은 관리[監門]로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 뒤 진왕(진승)과 무신군(항량)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곳곳에서 장수들이 일어나 세력을 다투었는데, 이 고양(高陽)을 지나간 사람만도 수십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도량이 좁고, 까다로운 예절을 좋아하며, 자기만 옳다고 여겨,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습니다. 이에 역선생은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원대한 계책을 속 깊이 감추고 있었는데, 이제 패공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꾼 듯합니다. 어제 제가 고향 마을로 가니 저를 불러 말하기를 ‘패공께서는 거만하여 남을 잘 업신여기시지만, 천하를 위한 계책이 많고 또 뜻이 크신 분이시라고 들었네. 참으로 내가 따르며 섬기고 싶은 분이나 나를 그분에게 이끌어줄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그 일을 좀 해주게’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감히 패공을 찾아뵙고 아뢰는 것입니다.”

“좋다. 그럼 그를 만나보겠다. 그에게 객사(客舍)로 들라 이르라.”

마침내 패공이 그렇게 역이기를 만나보기를 허락했다. 실은 그 무렵 들어 패공도 어렴풋하게나마 새로운 인재가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패공 주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으나, 떠나가 버린 장량을 빼면 그들은 한결같이 무장(武將)들이었다. 소하처럼 문관이 있어도 한낱 도필리(刀筆吏)로 장부를 적고 돈과 곡식을 셈하는 데만 밝았다.

그런데 그 기장(騎將)의 얘기를 듣고 보니, 역이기는 그들과 전혀 부류를 달리하는 인재 같았다. 장수로는 닭 한 마리 잡을 힘이 없고, 도필리로도 그리 유능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곁에 두면 요긴하게 쓰일듯했다.

(옛적 이윤(伊尹)이나 강상(姜尙) 같이 큰 인물이기를 감히 바라지 않는다. 앉아서 천리 밖을 헤아리고 세 치 혀로 만(萬) 사람을 달랠 수 있는 재주까지는 못되어도 좋다. 그 사람에게서 천하 형세를 바르게 살필 수 있는 안목만 얻어도 된다. 일의 먼저와 나중, 무거움과 가벼움만 가릴 수 있어도 지금의 이 막막한 심사는 한결 덜어질 것이다........)

패공 유방이 역이기를 만나보려고 한 속마음은 대강 그랬다.

역이기가 객사로 찾아온 것은 마침 패공이 여자들에게 발을 씻기고 있을 때였다. 당시의 습속 탓도 있지만, 여자와 관련된 패공의 행실은 그리 단정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닐 때 얻었던 호색(好色)한다는 평판은 관리가 되고 결혼을 한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목이 잘릴 죄가 되지 않는다면 여자를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패공의 그같은 호색은 그의 도가적(道家的)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생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뒷날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 보면 패공은 다분히 도가적인 사람이었고 그 믿음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리에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 무위자연이 속되게 해석되면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이 되고, 유가(儒家)의 눈에는 방탕과 호색으로 비칠 수도 있다.

어쨌든 패공의 그같은 행실은 나중에 무리와 더불어 망산(芒山)과 탕산(탕山) 사이에 숨어살 때나, 몸을 일으켜 패현을 차지하고 초회왕의 장수가 된 뒤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를 돌아다니면서도 여자 없이는 하루 밤도 지내지 못했다. 전란의 시기를 맞아 값싸고 흔해진 여자를 거둬들여 밤마다 자신의 군막으로 들이게 했다.

그날 패공의 발을 씻고 있던 여자들은 전날 밤 패공의 군막에 들어 함께 잠자리를 시중든 둘이었다. 패공은 다리를 벌리고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면서 찾아온 역이기를 맞아들였다.

방안으로 들어간 역이기는 두 손을 모아 읍(揖)을 할 뿐, 절을 하지 않고 삐딱하게 물었다.

“당신[足下]은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치려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 하십니까?”

오랜 불우(不遇)와 소외를 겪는 동안에 많이 비뚤어지기는 했지만 역이기는 본질적으로 유가(儒家)였다. 패공의 무례에 실망한 역이기가 그런 물음으로 서운함과 미련을 아울러 나타냈다. 그러잖아도 역이기가 뻣뻣하게 구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패공이 그 물음에 벌컥 성을 내며 꾸짖었다.

“이 미친 더벅머리 선비 놈아! 천하가 진나라에게 고초를 받은 지 이미 오래거늘, 무슨 헛소리냐? 제후들이 서로 힘을 합쳐 진나라를 쳐 없애려 하는데, 네놈은 어찌 진나라를 도와 다른 제후들을 친다는 말을 입에 담는가?”

하지만 역이기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마주 꾸짖었다.

"당신이야말로 제정신이요? 그런 꼴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요? 당신이 참으로 백성들을 끌어 모으고 군사들을 거둬들여 저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려 한다면, 그렇게 거만하게 걸터앉아 나이 들고 식견 높은 이[長者]를 만나서는 아니 되오!”

그러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패공이 갑자기 발씻기를 멈추고 일어나면서 역이기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먼저 의관(衣冠)을 갖추고 나와 선생께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관을 받쳐 쓴 뒤 다시 나왔다.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앉힌 패공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머리를 수그리며 간곡하게 말했다.

“조금 전에는 내가 눈이 있어도 어른을 알아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우레와 같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눈과 귀를 씻고 나왔으니 어리석다 버리지 마시고 깨우쳐 주십시오. 제가 어찌해야 저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이후 중국의 모든 황제에게 이상이 된 유방의 덕목(德目)이 처음으로 정치화(政治化)하는 순간이었다. 용인술(用人術)이라면 너무도 절묘한 이 용인술 때문에 뒷날 역이기는 산 채로 끓는 기름가마에 튀겨지면서도 원망 없이 죽어간다. 그날 고양의 객사에서도 역이기는 이미 감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역시 세상은 헛된 이름을 전하지 않는구나! 공은 과연 도량이 넓고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어쩌면 잘못을 빌어야 할 쪽은 이 늙은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품었던 서운함과 실망은 깨끗이 잊은 듯, 도리어 그렇게 사죄했다. 그런 다음 학문과 재주를 다해 패공의 물음에 답하는데, 대개는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의 이치로 천하의 일을 풀어나갔다. 한나절이나 공손하게 역이기의 말을 들은 패공은 몹시 기뻐했다. 역이기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게 한 뒤에 다시 배우는 아이처럼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어떤 계책을 써야 합니까?”

그러자 역이기가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공께서는 떠도는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어지럽게 흩어진 군사들을 거둬들여 3만 대군을 일컬으시나, 실상 거느리신 것은 정병(精兵) 1만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보잘것없는 군세를 몰아 강한 진나라로 바로 치고 들려고 하시니, 이는 벌거벗고 호랑이 아가리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여기 이렇게 한없이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100리도 안돼 진류(陳留)가 나옵니다. 천하의 요충(要衝)으로 크고 작은 길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곳인데, 그 성안에는 많은 식량이 쌓여있습니다. 먼저 진류성을 차지하면 함곡관(函谷關)으로 가는 넉넉한 밑천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요충이요 수십만 석 군량을 쌓아둔 곳이라면 방비도 엄할 터, 창읍성도 떨어뜨리지 못한 이 군세로 어떻게 진류성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패공이 자신 없어 하며 물었다. 역이기가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수록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마침 이 늙은이가 진류 현령을 잘 알고 있으니 내가 먼저 사자로 가서 그를 한번 달래 항복을 받아 보겠습니다. 패공께서는 진류 현령이 내 말을 듣지 않거든 허장성세(虛張聲勢)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성을 들이치십시오.”

“그리되면 선생께서 위태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진류는 내 고향이라 미쁜 벗들도 많고 나를 따르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설혹 현령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이 한목숨 지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패공께서는 오늘 밤 가만히 군사를 움직여 진류성 부근에 숨겨 두셨다가 내일 아침이 되어도 내게서 소식이 없으면 바로 밀고 드십시오. 그러면 내가 패공의 군세를 업고 다시 한번 현령을 달래보고, 정히 아니 되면 성안에서 호응해 힘으로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역이기는 말 한 필을 얻어 타고 진류로 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역이기가 현령을 찾아가자, 젊은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온 현령이 물색 모르고 반겼다. 조용한 후원으로 술상을 차려오게 해 오랜만에 찾아온 벗을 대접했다. 몇 순배 술잔이 돈 뒤에 역이기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옛말에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둥지를 틀고, 어진 사람은 주인을 가려 섬긴다 하였네. 자네는 여러 해 진나라의 벼슬살이를 했으나, 이제 주인을 가려 섬길 때가 된 듯하이. 패공 유방은 초 회왕(懷王)의 명을 받아 5만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정벌하러 가는 장수일세. 탕현에서 출발하여 대쪽을 가르는 듯한 기세로 밀고 들어오고 있으니, 머지않아 이곳에도 이를 것이네. 서쪽으로 가는 지리(地利)와 여기 쌓여있는 수십만 석 군량을 얻기 위해 반드시 이 진류성을 칠 것인즉, 거록의 싸움에서 크게 져서 기가 꺾일 대로 꺾인 진나라 군사 몇천 뿐인 자네가 무슨 수로 그 대군을 당해내겠나? 성이 떨어지면 돌과 옥이 함께 타듯 모두 죽게될 것이니, 그보다는 차라리 항복하여 나와 함께 패공을 섬겨보는 게 어떻겠나?”

하지만 수십 년 높고 낮은 벼슬을 살아오는 동안에 누구보다도 진나라 법의 무서움을 잘 아는 현령은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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