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2월 첫째주

입력 2003-11-30 19:00수정 2009-10-1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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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농촌문맹퇴치 계몽활동에 나선 대학생들이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말뿐인 成人敎育▼

豫算措置는 漠然…冬期事業도 벌써 失期 憂慮

앞서 문교부에서는 금년 十二월 초순부터 명년 四월까지 五개월에 걸쳐 전국 문맹자에 대한 계몽교육을 강력 추진하기 위하여 그 소용예산으로 一천四백五십만 환을 계상하였다고 한 바 있었는데 동 사업은 상금에 이르기까지 하등의 진전을 보이고 있는 흔적이 없는 채 시일만 벌써 초반순(初半旬)을 보냈고(…).

문교부에서는 전국 문맹자 총수 二,七八七,一七二명 중 교육실시 대상자로서 二,四○○,○○○명을 파악하고 있는데 (…) 이에 따른 제반준비도 지지부진하고 있어 금번의 동기를 이용하는 문맹자의 퇴치운동은 사실상 공문화(空文化)될 가능성이 십 중 八, 九인 바 당국의 각별한 방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동아일보 1953년 12월 7일자에서>

▼문맹퇴치운동으로 ‘작대기 투표’ 퇴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실시된 1955년 인구센서스 결과 남한 인구는 2150만명이고 이 가운데 문맹자 기준연령인 12세 이상은 1226만여명이었다. 1953년의 인구상황도 비슷했다고 가정하면 그 무렵의 문맹률은 23% 남짓이었다는 얘기다.

2∼3%로 추산되는 지금의 문맹률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우민화정책의 영향으로 광복 당시엔 문맹률이 77.8%에 이르렀다는 게 미군정의 통계다. 5명 중 4 명꼴로 한글을 읽고 쓸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문맹퇴치 성인교육이 대대적으로 전개됐고 1948년 정부수립 때는 그 비율이 벌써 41.3%로 낮아졌다는 것.

이 같은 급속한 문맹퇴치는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광복 직후부터 1954년 14%, 1958년 4.1%로 이어지는 통계는 ‘정부의 실적 부풀리기’ 의도가 끼어들어 신빙성이 낮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중앙대 이희수 교수(교육학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 말의 성인교육은 그 다음해 5월의 제3대 민의원선거부터 막대 기호로 후보를 구별하는 ‘작대기 투표’를 없애 관권선거의 소지를 막자는 여론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이 무렵 문맹퇴치사업은 ‘민주주의의 토대로서의 한글교육’이라는 엄정한 시대적 과제를 구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즘은 ‘문맹’의 기준이 ‘글을 읽을 줄 아느냐’(초교 2년 수준)에서 ‘문맥을 이해할 수 있느냐’(초교 6년 수준)로 바뀐 상황. 오늘날 그 수치가 25%(한국교육개발원, 2002년)나 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그 해결책은?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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