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토털 리콜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10월 17일 18시 50분


팬이 많다, 언어에 문제가 있다, 자수성가했고 정치경험이 많지 않다….
지난주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우리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꽤 있다. 각기 강력한 터미네이터와 순박한 하회탈의 ‘이미지’로 유권자의 정서를 파고든 것도 그렇고 기존 정치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당선된 점도 똑같다.
슈워제네거의 어눌한 영어발음은 우리 대통령의 앞뒤 안 가리는 말처럼 소박함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민가정 출신의 아메리칸 드림과 가난을 딛고 성공한 코리안 드림은 유권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야기 정치학’의 승리를 가져왔다.
▼터미네이터와 우리 대통령▼
그들에게 정치경험이 적다는 건 오히려 플러스였다. 무능하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거꾸로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정치적 빚이 없다는 건 이익집단에 휘둘리거나 부패할 우려가 없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대통령을 연구할 리 있으랴만 LA타임스가 슈워제네거에게 한 충고도 많이 들어본 소리다. “견해가 다른 정치인과 협력해야 한다, 경험 많고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여야 한다…” 등등.
현직 주지사를 리콜(recall)해 당선된 슈워제네거와 스스로 리콜을 요구한 우리 대통령은 이제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참여정부’에 자부심을 지녀 온 대통령은 다시 한번 국민의 힘으로 일어서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세금 등 난제에 부닥칠 때마다 주민투표를 하겠다고 밝힌 슈워제네거도 우리 대통령과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을까 쓸데없이 걱정된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잘못 판단한 게 있다. 기성 정치인과 언론이 발목을 잡아서, ‘그들’이 부패해서 정치 쇄신을 못했다고 이유를 바꿔가며 대통령직을 건 토털 리콜(Total Recall)을 청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잃은 건 그래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추어리즘은 참고 기다려도 ‘당신의 부패’만은 못 봐준다는 국민정서를 노 대통령은 벌써 외면하고 있다.
희망돼지를 자랑스레 내세우며 유독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던 대통령이었다. 그의 20년 집사가 대통령 아들 결혼식 날 11억원을 받았다는 건 이 정권 역시 썩은 정치판과 한통속임을 말해준다. 대선 후 돈벼락에 대통령 캠프가 이성을 잃었다는 민주당 대변인의 주장엔 듣는 이가 이성을 잃을 판이다.
노 대통령은 억울할지 모른다. 직접 정치자금을 챙긴 전직 대통령도 있는데 돈 구경도 못한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이. 그러나 집권하자마자 권력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부패다. 신참 그룹이 권력의 맛과 위세를 확인하며 정치권에 편입되는 과정부터 부패가 시작된다고 새뮤얼 헌팅턴은 갈파했다. 사방을 연고(緣故)와 코드인사로 채우고 그중 한 사람인 안희정씨의 스캔들이 터지자 “그는 내 동지”라고 감쌌을 때 이미 오늘의 사태는 예견돼 있었다.
이를 무시한 채 대통령 못해 먹겠다며 자청한 국민투표가 진짜 성사될지는 두고 봐야 안다. 재신임을 얻으면 무능은 물론 부패까지 사면될 것으로 계산했을 텐데 야권에서 이를 반대하니 난감해진 것도 당연하다.
더 난감한 건 국민이다. 차라리 국민투표를 하면 명쾌하다. 불신임되면 약속대로 물러날 것이고 재신임된다면 ‘정치적 환경’이 나빠 못했다던 정치개혁을 하면 된다.
▼정권 위기의 본질은 부패▼
문제는 국민투표도 않고 서로 남 탓하면서 총선까지 지지부진 시간만 보낼 경우다. 대통령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니 개혁을 할 수 없다며 지금 같은 ‘정체성’을 지켜갈 것으로 보인다. 연고주의와 코드인사가 부르는 무능과 부패, 막말은 물론 때와 장소와 상대에 따라 변하는 언사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게 뭐가 잘못이냐는 데야 개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국민이 바뀌는 수밖에. 전 국민이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 되어 “맞습니다, 맞고요”를 외친다면, 대통령 대접 안 해 준다고 투정했던 애정결핍증 대통령은 절로 힘이 나서 스스로 옳다고 믿는 국정운영을 할 것이 분명하다. 교육방송마저 코드방송에 돌입했으니 아이들까지 홍위병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는 사이 이 나라가 동북아 경제중심이 될지, 실업자로 가득한 흉가가 될지는 그야말로 국민의 운에 달렸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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