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요코'…행동하는 예술혼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17분


지난해 영국 리버풀의 존 레넌 공항에서 레넌 동상 앞에 선 오노 요코.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영국 리버풀의 존 레넌 공항에서 레넌 동상 앞에 선 오노 요코.동아일보 자료사진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클라우스 휘브러 지음 장혜경 옮김/360쪽 1만8000원 솔

오노 요코(小野洋子·70). 이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존 레넌’이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연상작용은 대개 이렇다. 20세기의 문화 상징이 된 ‘비틀스’, 그리고 그 ‘안’과 ‘밖’에서 중심을 잡았던 레넌, 그리고 그의 일본인 아내 오노.

과연 그뿐일까. ‘비틀스’ 해체의 주범으로 몰려 일생 동안 거부와 조롱과 비난에 시달렸지만 오노는 레넌의 아내이기 이전에 다재다능한 전위 예술가였고 격정적인 삶을 산 ‘인생의 모험가’였다.

1967년 오노 요코가 영국 런던 트패펄가 광장에서 선보인 ‘포장 이벤트’. 오노는 스페인 함대를 무찌른 넬슨 제독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석조 사자상을 흰 천으로 덮음으로써 영국인의 자존심에 조롱을 보냈다.사진제공 솔

이 책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오노의 또 다른 모습들을 짚어간다. 레넌의 눈으로 보는 오노가 아닌, 오노의 눈으로 본 레넌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예술가, 그리고 방랑자 오노 요코=도쿄 은행가의 딸 오노는 보모들의 손에서 자라며 늘 채우지 못한 갈망을 지닌 채 살았다.

그는 1953년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부모는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했지만 오노는 좀더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1957년 스물넷의 오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음악가 이치야나기 도시와 결혼했다. 뉴욕에서 오노는 미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마르셀 뒤상, 무용가 마사 커닝엄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예술과 만났다.

길을 찾지 못한 그의 예술적 방황은 결혼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예술혼은 음악 행위예술 미술작품 전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나타났다. ‘성(性)적으로 문란한 생활’도 그 중 하나였다.

오노는 1962년 법적으로 이혼 절차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앤서니 콕스와 결혼식을 올렸고, 7년 뒤 존 레넌과 결혼했다.

▽평화운동가 오노 요코=‘당신이 원한다면, 전쟁은 종식된다(WAR IS OVER, if you want it)’. 1969년 말 오노와 레넌은 평화 캠페인에 이 문구를 내걸었다.

이보다 몇 개월 전 오노와 레넌은 ‘플래스틱 오노 밴드’를 통해 ‘평화에게 기회를’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 때문에 오노와 레넌은 ‘행동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얻었다. 물론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다. 이때 이후 오노의 관심은 평화와 반전에 있었다.

▽여성운동가 오노 요코=오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은 세상의 검둥이”라고 말했다. 오노는 이 말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여성운동의 찬가이자 1970년대 여성들에게는 해방의 노래였다.

오노는 당시 여성운동가들이 ‘해보고 싶어 했던’ 부부 역할 바꾸기도 행동에 옮겼다. 오노는 사업을 했고 레넌은 집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해방은 남녀 중 어느 한 쪽이 특권을 부여받고 다른 한 쪽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는, 동등한 권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오노는 영화 제작자이며 전위적인 전시 예술가이다. 런던 중심의 전승기념비를 흰 천으로 감싸는 ‘포장 이벤트’(1967)를 통해 영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오노는 예술을 통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했다. 때로는 레넌과 함께했지만, 오노는 레넌과 별개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럼에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노는 말했다. “나에 대한 반감은 적어도 세 종류입니다. 반 아시아, 반 페미니즘, 반 자본주의적 반감이지요.” 그러나 이제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예술과 열정의 삶을 살아온 오노는 전통적 형식을 뒤엎은 예술가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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