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반병희/경제, '말'에 멍들지 않을까

  • 입력 2003년 4월 21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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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쏟아내는 말의 ‘성찬(盛饌)’을 보면 ‘철학의 빈곤(Lack of Idea)’을 느낀다. 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예사고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사회적 공감대를 무시한 발언도 거침없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말 “현실과 제도 사이의 격차를 감안해 보통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경제개혁을 하겠다”고 말했다. 속도조절론에 무게가 실리자 불안해하던 재계는 반색했다. 그러나 대외 경제여건이 나아지는 듯하자 이정우 대통령정책실장은 지난 11일 “속도조절론이 나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쐐기를 박았다.

정부는 재벌개혁을 위해 계열사끼리의 부당한 상호출자 및 지원은 철저히 막겠다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카드사 대책으로 증자안을 내놓으면서 “대주주들이 협조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자본(대주주)의 금융자본(금융계열사) 지배는 절대 안 된다던 정부가 ‘사정이 다급하니 이번만은 괜찮다’는 식으로 견해를 바꾼 것이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출자총액 제한에 관한 발언도 그렇다. 그는 11일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출자규제 예외 인정 등 예외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가 사흘뒤 크레스트증권의 SK㈜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자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출자규제 예외 인정으로 SK그룹(SK C&C 등)의 의결권이 늘어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나흘뒤엔 출자규제 강화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SK㈜ 사태와 관련한 김진표 경제부총리의 “내외국인 모두 소유권 목적의 주식취득이 가능하므로 정부는 합법적 절차를 거쳤으면 간섭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또 어떤가. 외국자본의 한국투자는 적극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마련했는지 의심스럽다.

월가(街)의 대표적 금융자본인 타이거펀드가 과거 SK텔레콤을 상대로 취했던 행태는 국제금융자본이 어떤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타이거펀드는 주주가치 우선을 명분으로 설비투자까지 막으며 주가 끌어올리기에 집중했고 증시가 좋아지자 보유주식을 모두 팔아치워 7200억원의 차익금을 챙긴 채 유유히 빠져나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한국산업의 균형발전 같은 건 타이거펀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책결정자들은 이제 설익고 앞뒤도 맞지않는 말잔치를 거둬야 한다.

반병희 경제부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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