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규진/'부실대출' 강요할 땐 언제고…

  • 입력 2003년 2월 3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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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7581명×4=23만324명.

외환위기 직후인 97년 12월부터 2001년 7월까지 강도 높은 금융구조조정으로 5만7581명의 은행원이 직장을 떠나야 했다. 여기에 4를 곱하면 대략 이들 가족의 숫자가 된다.

이들 23만여명은 외환위기를 불러온 은행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떠안은 셈이다. 이때 쫓겨난 은행원들은 “은행 부실의 근본원인은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은행 시스템의 문제”라면서 지금도 억울해한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울분을 은행산업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달랬다. 이들의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국내 은행들은 그 후 경제논리에 바탕을 둔 대출관행을 확립해야 했다. 또 정치논리에 따른 대기업 특혜지원과 이 때문에 빚어지는 은행 부실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현대상선의 대북비밀송금과 은행들의 현대계열사 지원을 보면 퇴직 은행원들의 희생이 덧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상선이 대출받은 돈 2억달러를 북한에 보낸 2000년 이후 공교롭게도 현대건설 현대유화 하이닉스 등 현대 관련 회사들은 경영위기에 몰릴 때마다 외환위기 이전의 대출심사 기준에 따른 금융지원을 받았다.

2001년 4월 채권은행들은 ‘국가경제 파탄’ 우려를 들어 현대건설에 무려 3조원을 지원했는가 하면 ‘대출은 곧 손실’을 의미하는 하이닉스에 대한 지원도 계속했다. 지난해 말 하이닉스 채권단의 모 은행장은 “하이닉스 대출에 대해서는 대손충당금을 무조건 100% 쌓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이닉스 지원결정을 수용했다.현대그룹의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물론이고 국내 최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도 현대 때문에 골병이 든 지 오래다.

지원받은 현대 계열사들이 경영정상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많은 은행이 또다시 부실은행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번에도 은행직원들이 희생양이 될 것이다.

‘남북 화해협력을 위해서는 은행을 다시 부실화시킬 수도 있고 직원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면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으면서 피눈물을 뿌린 은행원과 그 가족 23만명은 얼마나 분통을 터뜨릴까.

임규진기자 경제부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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