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재창/인터넷 민주주의의 과제

  • 입력 2002년 12월 24일 18시 06분


이번 대선 과정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에 의한 권력의 과점(寡占)이 무너지고 다수의 소외 계층이 새로운 정치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는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과정이 열성적인 일반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먼저 구현된 서구사회에서 정치적 기득권이 무너지고 평민이 참정의 주체로 등장하는 전기(轉機)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으로는 흔히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을 거론한다. 후자가 절대왕권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성취한 데 반해 전자는 왕권과 대화를 통해 점진적 권력 분점에 나섰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디지털이 만든 또 다른 소외▼

전자가 무혈혁명 양식을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앵글로색슨족의 대면(對面) 문화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면전에서 직접 거론하고 따지는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런 문화적 학습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경우 이를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폭발하면서 기존의 모든 질서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를 모색한다.

우리도 대면 문화가 결여되어 있어 얼굴을 드러내고 어떤 일을 따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인지 정치적 불만이 있어도 이를 속으로만 삭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폭발을 일으켜왔다. 48년 건국 이후, 60년의 학생혁명, 70년대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80년의 광주항쟁, 87년의 6월항쟁 등 대체로 10년을 터울로 응어리진 설움을 분출해 온 셈이다. 그래서 ‘한국사회변동 10년 주기설’이 제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런 패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요인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기 시작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인터넷 보급으로 인해 대면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대선의 성패가 인터넷 상에서 만나는 20, 30대의 적극적 대화와 참여에 좌우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웅변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런 익명성과 네트워크에 기초하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는 또 다른 차원의 소외와 배제를 잉태한 채 출범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겠다. 디지털 격차에 의한 참정 기회의 원초적 박탈이 그것이다.

아직도 산업사회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에 머물러 있는 구세대,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저소득층, 농촌 산간지역에서 살아가는 기층민 등 컴퓨터와 인터넷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이들은 사실상 이 역사적 변환의 대오(隊伍)로부터 강제 추방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반면 인터넷 세대는 새로운 대화와 참여의 양식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이라는 추가적인 참정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참여 기회를 추가적으로 확장한 인터넷 세대와 관행적인 참여 공간에만 머물러 있는 기성 세대간의 불균형 경쟁을 통해 구체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배제와 불균형은 과거 기득권층이 소외집단에 강요하던 외면과 격리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하고 우려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새로운 참여의 양식과 공간을 개척한 인터넷 민주주의는 앞으로 이 새로운 유형의 소외와 배제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노사모, 정보격차 해소 앞장을▼

그런 만큼 인터넷 민주주의에 먼저 눈뜬 집단과 계층이 이런 유형의 차등과 위계의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때마침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인터넷 상에서 만나 결속하고 활동해 온 ‘노사모’ 내부에서는 단체의 진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전언이다. 어떤 성격의 단체로 탈바꿈하든 노사모가 앞으로 유의해 나가야 할 우선적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이 디지털 격차의 시정에 앞장서는 일이다. 노사모가 보여준 기성 정치체제의 타파에 대한 열정과 수고가 차등과 소외 없는 인터넷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에도 발현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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