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서대문

  • 입력 2002년 12월 11일 18시 14분


서울 성곽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등 4개의 산을 빙 둘러 연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의 총 길이는 40여리, ㎞로 환산하면 17㎞이었다고 하는데 중국의 만리장성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다. 성곽에는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을 만들어 지방 8도와 통하도록 했다. 조선시대 이 문들은 밤 10시가 되면 종소리와 함께 일제히 닫혔으며 새벽 4시에 다시 열렸다. 오늘날 이 ‘4대문’ 가운데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이 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을 뿐 서대문과 북문은 시민들에게도 생소하다.

▷‘돈의문’이라는 명칭의 서대문은 일제침략 이후인 1915년에 헐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로확장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신문로 2가 강북삼성병원 앞 도로 위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1396년 조선조가 성곽을 신축할 당시 서대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태종 13년(1413년)의 기록을 보면 돈의문은 사직동 고개에 있었으며 이후 두 번에 걸쳐 위치가 옮겨졌다. 한편 북문인 숙정문은 청와대 부근인 삼청공원 뒤편에 있으나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다.

▷서대문에는 여러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군들이 입성을 한 것도 서대문이었으며 이들이 관군에 쫓겨 도망간 곳도 서대문이었다. 이괄 등이 서대문으로 빠져나가려 할 때 사람들은 미리 문을 닫아 퇴로를 차단했다. 시민들이 반군을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서대문은 중국으로 가는 관문이자 한강을 거쳐 각종 물산이 모이는 마포와 연결되어 있어 부근에 큰 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을 급습하기 위해 택한 것도 바로 서대문이었으니 나라를 잃은 설움도 서려 있었다.

▷서울성곽 복원사업에 따라 돈의문이 복원된다고 한다. 서울 도성은 풍수지리와 오행을 면밀히 따져 세운 곳이다. 특히 북문인 숙정문은 음기가 센 곳으로, 남대문인 숭례문은 양기가 강한 곳으로 해석되어 큰 가뭄이 들면 조정에서 남대문을 닫아 놓고 북문을 계속 열어 놓았다. 북문은 수백년에 걸쳐 문을 닫아놓은 채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문을 열 경우 음기가 강해져 여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했다나. 서대문 복원은 이처럼 풍수지리에 입각한 서울의 역사성을 되살리는 의미가 있지만 복원될 위치가 도로 한복판이라고 하니 교통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복원에 앞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