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어떤 시대를 열 것인가

  • 입력 2002년 12월 2일 18시 16분


한 해가 저물듯 한 시대가 지나고 있다. 이승만(李承晩)의 건국시대, 박정희(朴正熙)의 근대화시대에 이어 이른바 양김(兩金)의 민주화시대가 지나기까지 반세기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순탄한 여정은 아니었다. 분단과 전쟁, 혁명과 쿠데타, 독재와 부패로 어느 시대인들 편치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았고 희생됐다. 아직도 시대의 모순이 빚은 상흔은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틀린 길은 아니었다. 나라를 세웠으니 근대화도 가능했던 것이고 경제성장이 있었기에 민주화의 물적 기반도 마련될 수 있었다.

▼'보수 아니오, 진보 아니오'▼

물론 지난 시대를 이렇듯 단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비판과 반론이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미래를 얘기하기 위해 큰 얼개의 밑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하기에 단명한 장면(張勉)의 내각제정부와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부는 생략했다. 전-노 정부는 그 본질에 있어 박정희 시대의 연장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흔히 말하는 3김 시대에도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지역할거주의 측면에서 세 김씨를 한 반열에 세울 수는 있을지 모르나 민주화시대로 구분하는 한 JP를 포함시킬 수는 없다. JP는 DJ YS의 지역대결구도에 편승해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 아니던가. 하기야 양김이든 3김이든 새삼스럽게 그걸 따질 필요는 없을 터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어떤 시대를 맞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선거의 화두(話頭)는 바로 그것, ‘어떤 시대’에 맞춰져야 한다. 양김의 민주화가 사실상 겉모양의 민주화에 그쳤다면 그것을 어떻게 실질적 민주주의로 발전시켜 나갈지, 영호남정권을 거치며 심화된 맹목적 배타적 지역감정을 어떻게 완화 해소시켜 나갈지, 골치 아픈 평양정권과는 어떻게 남북 평화공존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그런 큰 틀에서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모색하고 국민적 공감을 끌어내는 마당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31년 만이라는 이회창(李會昌)-노무현(盧武鉉) 양강(兩强) 구도는 ‘양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내세우는 슬로건이 고작 ‘정권교체’ ‘세대교체’여서야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설렘도 감동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평화적 개혁세력’이요, 당신네는 ‘수구적 냉전세력’이라거나 우리는 ‘안정 개혁세력’이요, 너희는 ‘급진 부패세력’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적대적 편가르기에 급급해서야 어느 쪽이 승리하든 과연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수-진보라 하면 양쪽이 모두 ‘보수가 아니오, 진보가 아니오’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도 보기 민망한 일이다. 당당하게 보수와 진보를 말하고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평을 넓힐 수는 없는가.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는 적대적 개념이 아니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틀이 건강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도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양측은 그걸 서로 인정하고 ‘어떤 보수’이고 ‘어떤 진보’인지를 국민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데서 실체도 불분명한 보-혁 갈등에 세대간 계층간 갈등이 뒤엉키면서 사회 전체가 소모적인 대립구도로 흘러가는 것이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선 후보 합동토론부터라도 이회창-노무현 후보는 ‘어떤 보수’이고 ‘어떤 진보’인지를 밝히고 왜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지를 국민에게 말해야 한다. 상대를 비판하고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당위성을 구체적 정책을 통해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러지 않고 ‘DJ 양자-수구세력’ 공방이나 되풀이한대서야 대선 이후라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으랴.

▼'우리 속의 분열주의' 몰아내야▼

어떤 시대를 열 것인지는 단지 ‘양강’에 걸린 문제가 아니다. 결국 유권자인 국민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러자면 지난 세월 정치권력이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한 지역패권주의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속의 분열주의’를 내몰아야 한다. 누구를 지지하든 상대가 적이 아닌 함께 해야 할 사회공동체의 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 시대는 그제야 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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