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우리 회장님은 일본에…"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28분


요즘 일본에 있는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달 들어 일본에 와서 머물고 있는 기업 총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도쿄(東京)에서 제19차 한일 재계회의가 열린 26일을 전후해서는 더 심해졌다.

일본의 경단련(經團連)과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년 상대국을 오가며 개최하는 이 회의에 올해는 한국측에서 21명의 기업인이 참석했다. 1983년 상호 방문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초청자인 일본측 참석자 17명보다도 많다.

참석 인사들의 면면에서도 중량감이 넘친다. 손길승(孫吉丞) SK 회장, 유상부(劉常夫) 포스코 회장, 조석래(趙錫來) 효성 회장, 김승연(金昇淵) 한화 회장, 박용오(朴容旿) 두산 회장 등등.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장기간 머물고 있는 총수들까지 포함하면 한국의 전경련이 도쿄로 옮겨온 듯한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한국측 참석자들이 많아 주최측은 이날 회의에서 발언 기회를 골고루 주기 위해 한 사람당 발언시간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기업 총수들이 바쁜 연말에 왜 일본으로 이처럼 몰려왔을까. 손병두(孫炳斗)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올해 일본의 두 경제단체인 경단련과 일경련이 통합해 출범했기 때문에 상견례를 겸해 많이 참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측 관계자들에게 “진짜 이유가 뭐냐”고 집요하게 묻기도 했다.

기업 총수들 중 상당수는 회의가 끝나도 일본에 계속 머물거나 다른 나라로 장기 출장을 떠날 것이라고 한 재벌그룹의 임원은 귀띔했다.

“회장님은 대통령선거 전에는 귀국하지 않을 겁니다. 국내에 있으면 골치 아프니까요. 제2의 경제위기설로 국내상황이 뒤숭숭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재벌 총수들이 정경유착의 의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또는 선거 때마다 있어온 후보들의 선거자금 지원 요청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 투표도 포기한 채 남의 나라를 전전해야 하는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영이 도쿄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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