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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1월 8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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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철학과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서양문화가 2단계 전환을 거쳐 자기정체성을 형성했다고 본다. 첫 번째 전환은 멀리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뮈토스(신화)에서 로고스(논리)로’라는 말로 집약되는 변화를 통해 고대 서양인은 감각보다 개념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전환은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둔 과학이 탄생한 근대에 일어났다. 근대 서양인에게 개념은 이름일뿐(唯名)이고 감각에 다시 무게가 주어졌다.
서양문화는 지금 제3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통상 탈근대사상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변화는 멀리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됐다.
이 책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쟁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불리는 1960년대 이후의 현대 프랑스철학은 신니체주의(푸코 들뢰즈 데리다) 신프로이트주의(라캉) 신마르크스주의(알튀세르)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상을 보충하고 변형하는 양상을 보였다. 저자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쟁점을 소개하면서 이 쟁점들속에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상이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의의는 단순히 현대 프랑스 철학의 핵심을 파고드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가 ‘계사(繫辭)존재론’이란 개념으로 독자적인 철학적 행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데 있다.
계사란 논리학에서 영어의 be 동사처럼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말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라틴어 코폴라(copola)의 번역어. 코폴라는 원래 무엇인가를 묶고 조이는데 쓰이는 모든 것, 한마디로 끈을 의미한다. 코폴라, 영어로는 copula로 쓰이는 이 단어는 동양에서는 중국의 고전 ‘주역(周易)’에서 유래된 ‘계사’로 번역됐다. ‘주역’의 열 부분 중 하나인 ‘계사전(繫辭傳)’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논한 최초의 저술이었다.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런 일치에 주목하면서 저자는 서양인의 존재론적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결정한 논리학적 의미의 계사와 동아시아 존재론의 기초범주를 설정한 계사, 이 두 계사를 어떻게 엮을 수 있을 것인가 궁리한다.
서양 존재론은 ‘이다’와 ‘있다’를 동시에 의미하는 계사의 애매성 안에서 펼쳐졌다. 칸트는 중세의 존재론적 신 증명이 ‘이다’와 ‘있다’의 혼동에 근거한 증명임을 지적함으로써 계사속의 애매성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헤겔은 ‘이다’가 ‘있다’로 변화하는 애매성을 세계의 운동과정으로 봤다. 주역의 계사는 헤겔의 계사 이해와 비슷하다. 계사전에 나오는 ‘一陰一陽之謂道’(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는 문장은 이런 관점에서 읽힐 수 있다. 음과 양의 교체와 반복이 도(道)라면 도는 일종의 끈운동이다.
저자가 말하는 ‘계사존재론’이란 바로 없음과 있음, 죽음과 생명, 부정과 긍정, 음과 양 등 다양한 이항대립의 무한한 교대와 반복으로 구성되는 존재를 풀림과 조임의 끈운동, 즉 계사라는 끈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동서양 사상의 비교를 통해 ‘이미 서양사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동양사상을 통해 다시 본다’라는 동일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결국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생명충동 등과 맞닿아 있다고 언급하지만 그런 동일성 찾기의 무한한 나열이 진정으로 새롭고 독자적인 사상의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할 것인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좋은 점은 방대한 서양사상과의 독한 대결과 긴장속에서 뭔가 새로운 동양적 사상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에서 자생적 담론이 싹트기 위해 전통사상을 계승하는 것 못지않게 서양사상사의 핵심을 내면화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내면화의 노동없이 생산된 담론은 지구촌의 한구석을 떠나자마자 생명력을 잃게 될 허약한 사상일 것임이 틀림없다. 외래성의 극복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낙후성의 극복이며 서양의 극복보다 더 시급한 것이 동양의 자기극복이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