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역사는 2등도 기억한다

  • 입력 2002년 11월 5일 18시 28분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P변호사가 말했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말이에요. 이제 2등과 4등이 누가 될지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 같아요.”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1위를 차지하는 후보가 저만큼 멀리 가 있으니 그의 당선이 유력하고, 그 다음 두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을 펼치고 있으니 여기에서 누가 이기는지 볼만한 게임이 될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또 군소후보 중에서 누가 앞서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포인트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물론 그의 얘기는 일종의 우스갯소리였다. 선거에서 당선자 이외에는 순위가 어떻든 모두 패배자일 뿐이고 따라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정치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 특히 대선에서의 2등을 단순한 패배자로만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2등이 자리할 나름대로의 공간이 있고, 이는 민주주의의 정착에 참으로 소중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선 2등은 대선이라는 대형국가행사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한다. 선거가 끝난 후 선거결과에 승복하며 진심으로 당선자를 축하해줄 때 선거는 진정한 축제로 승화되고 국민통합도 이루어진다. 2등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거과정에서 생겼던 정당 지역 세력간 감정의 앙금이 녹는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2등은 또 다음 정권에서 야당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선에서 그가 얻은 표는 야당을 이끄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새 대통령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수권능력을 보여준다면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선거과정에서의 멋진 패배의 경험이 그를 큰 정치지도자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87, 92년 대선에서 각각 2등을 차지한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씨가 그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97년 대선에서 2등을 차지한 이회창(李會昌)씨가 현재 여론조사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을 우연으로만 볼 것인가.

2등의 정치적 위상이 제대로 확보되려면 무엇보다 선거전이 정정당당해야 한다. 선거전이‘죽느냐 사느냐’의 흙탕물싸움이라면 선거 후 당선자와 차점자가 서로를 인정하는 공간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역시절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한다”는 말을 자주 썼지만 잘못된 말이다. 그 말속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필코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승리 지상주의’가 배어 있다. 대선을 40여일 앞둔 지금 우리의 정치판도 바로 이런 모습인 것 같아 걱정이다. 강력한 상대후보를 꺾기 위해서는 이념과 노선이 전혀 다른 두 후보라도 단일화를 할 수 있다는 발상,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잇단 탈당행렬, 이들을 겨냥한 일부정당의 세확산 시도 등에서 ‘2등이 되는 것을 꿈에도 인정하기 힘든’ 우리정치의 살벌한 모습을 읽는다.

후보든 정당이든 최선을 다하되 안되면 2등을 하고 그래서 야당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우리정치도 그만큼 여유롭고 성숙해질 것이다. 바로 멋지게 질 줄 아는 정치다. 유권자의 기억회로에는 늘 지난 선거에서 멋지게 진 2등의 모습이 저장돼 있을 것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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