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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27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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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친구가 자신을 찾아달라고 방송국에 부탁한 동창 여학생을 도무지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평범하기 그지없고 상대방은 누구나 알 정도의 유명 인사였는데 말이다.
하긴 사람을 기억하는 메커니즘은 이름과 얼굴만 가지고 되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다.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사물 하나,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의 단서가 된다.
첫사랑이 깨졌다고 치자(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20대에도 사랑은 만만찮다).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비명이 날 지경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잊어야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게 생긴다.
이쯤 되면 고이 간직했던 편지와 사진을 꺼내 태우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상대방을 떠올릴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버린다. 사랑은 이루기도 어렵지만 남은 흔적을 지우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아날로그식 사랑이고 영화 ‘연애소설’에 깔린 기본 정서다. 주인공 지환(차태현)의 “시간이 있느냐”는 식의 촌스러운 접근과 수인(손예진)의 새치름한 거절,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 몇 년 후 지환이 받게 되는 흑백사진들까지.
디지털 시대 연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처음 만나거나 e메일로 사랑을 주고받는다. 영화 ‘후아유’처럼 아바타가 동원되고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헤어진 후엔? 디지털로 저장된 기록은 삭제 단추만 누르면 깨끗이 사라진다. 편지를 태우는 따위의 구질구질한 행사는 필요없다. 그의 이름이 붙은 메일 박스는 클릭 몇 번이면 통째로 날아간다. 디지털 기록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지만 지워버리는 건 순간이다.
연인들이여, 상대방의 흔적이 디지털로만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디스켓이나 CD에 옮겨 담아 서랍 안쪽에 깊숙이 넣어 놓으시라.
혹시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갑자기 그를 떠올리고 싶어졌을 때 기억을 되살릴 단서가 없어 애태울지 모를 일 아닌가.IT칼럼니스트
redstone@kgs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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