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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18일 1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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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교수의 ‘역사학의 역사’는 제 1부 동서양 역사학의 전통과 제 2부 한국 역사학의 전통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세계 사학사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한 교수의 동서양을 망라한 수천 년 간의 역사학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오랜 작업의 성과이다. 그는 1970년대 이래로 사학사 연구에 매달려서 ‘조선 전기 사학사연구’와 ‘조선 후기 사학사연구’ 그리고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3부작을 집필하고, 그 선행작업을 발전시켜서 삼국·고려시대와 해방이후 현대까지 한국 사학사의 통사를 완성한 다음, 그 위에 동서양의 사학사를 덧붙임으로써 마침내 세계사학사를 정리해냈다. 한 교수가 단독으로 이뤄낸 이번 성과는 가히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대한 작업의 빛나는 성과 이면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이 체계상의 불균형이다. 제 1부에서 동서양의 사학사를 100쪽 분량으로 다루는 데 비해, 제 2부 한국사학사를 위해서는 그 보다 3배 이상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동서양사학사는 전주곡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는 세계사학사가 아니라 결국 한국사학사에 머물고 말았다. 한국사학사와 적어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동서양사학사를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동서양사학사를 전경으로 해서 한국사학사의 넓은 시야를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한 교수의 말처럼 우리 역사학이 근대 이전에는 중국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근대 이후에는 서양 역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한국사학사의 서술 자체가 세계사학사의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특히 전 세계가 지구촌처럼 좁아진 오늘의 세계화 시대에서 자국사와 세계사의 분리를 지양할 수 있는 통합적인 역사의 시각이 긴급히 요청되는 상황에서, 한 교수의 저서는 앞으로의 한국사학사 연구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역사학의 역사로서 사학사란 역사연구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점이다. 어떤 주제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연구사적인 정리이고, 그 정리를 바탕으로 하여 수행된 연구의 마무리는 사학사적인 자리매김을 통해서 이뤄진다. 실제로 역사가는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역사가가 연구한 역사들을 연구하기 때문에 모든 역사연구는 기본적으로 사학사적인 연구이다.역사가 변하면 역사학도 변하기 때문에, 역사학의 역사로서 사학사가 역사학의 분야로 존재해야한다. 그런데 한국 역사학에서 사학사의 위치는 아직 불안하다. 그 불안의 일차적인원인을 나는 사학사에 대한 일관된 개념의 부재라고 진단한다. 한 교수는 사학사를 단순한 사서(史書)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정치이념과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는 지성사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그의 책을 보면, 사학사는 여전히 어떤 일관된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각 장마다 역사편찬의 역사, 역사관의 역사, 역사서술의 역사, 역사학의 역사 그리고 역사가의 역사 등 각기 다른 형태로 분석되었다. 따라서 사학사의 역사학 내에서의 위상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학사란 무엇이며 그 존재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종합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각 시대마다의 인간은 역사란 무엇이고, 과거를 역사로 어떻게 구성하여 서술할 것인지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발전시켜왔다. 굳이 분류한다면, 전자는 역사철학의 문제이고, 후자는 역사이론의 문제이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전자에 대해서는 자기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자기가 연구하는 구체적인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가가 연구하고 서술하는 역사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역사철학과 역사이론이다. 역사철학과 역사이론은 역사가가 서술한 역사의 배후에서 그의 작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메타역사’이다. 따라서 사학사란 역사(학)의 역사를 평면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 각 시대의 역사가들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었던 ‘메타역사’를 드러내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
근대에서 역사의 과학화는 ‘메타역사’의 상실을 낳았다. 역사가 과학의 한 분야로 정립되면서, 역사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역사인가와 같은 메타역사적 물음들은 역사학적인 탐구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최근 역사학의 위기가 나타나면서 메타역사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일어남과 동시에 사학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한국에서 과학적 역사의 보루는 실증사학이다. 실증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에서 아직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실증적인 역사연구의 공백을 메우고 그 한계를 성찰하게 해 주는 ‘역사학의 역사’와 같은 역작이 출현했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단지 더 큰 바램이 있다면, 앞으로의 사학사 연구가 단순한 역사서술의 역사에 머물지 말고 역사철학과 역사이론의 종합을 이뤄낼 수 있는 메타역사의 차원을 여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했으면 하는 것이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서양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