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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9월 29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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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중에 유행했던 농담이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16대 대통령 앞에 ‘멀고 험한 길’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압축적 풍자지만 실제 요즘 우리 정치판을 보면 이 농담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어렵다.
우선 현재의 다자(多者)대결구도가 계속될 경우 차기 당선자는 ‘30%대 득표율’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많은 여론조사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대선 후보 중 누구도 ‘3김(金)’과 같은 지역기반조차 갖고 있지 못한 마당에 40%를 넘지 못하는 지지율로 국정장악력을 갖추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불문가지다.
여기에다 이미 ‘진검(眞劒)’을 빼들고 맞붙은 각 후보진영의 사생결단식 대결은 ‘극렬 야당’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과반의석을 가진 거대야당’이나 ‘반(反)이회창 야당’에 시달려야 할 전망이다. 사실 한나라당은 이미 ‘DJ 초토화’에 나선 분위기다. 정보통으로 알려진 한 중진의원은 “이미 드러난 것 말고도 DJ일가의 비리자료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며 “끝까지 이회창 후보의 낙마(落馬)를 꾀하는 민주당의 배후에 DJ의 의중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우리 판단인 만큼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쪽 결의도 섬뜩하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우리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야당으로서의 역사와 투쟁경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며 전의를 감추지 않았다.
걱정은 이런 이전투구(泥田鬪狗) 속에서 중차대한 국가적 어젠다에 대한 논의마저 통째로 실종돼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앞으로 25년간 우리 자식들까지 부담해야 하는 156조원의 공적자금 처리 문제나 작년 말 현재 8조2000천억원의 실질 적자를 냈고, 확대일로가 예상되는 재정적자의 처리만 해도 차기 대통령이 간단히 해낼 수 있는 ‘설거지’가 아니다.
신의주 특구 개방 등 ‘북한발 온풍(溫風)’과 ‘4억달러 대북 지원의혹’이 부딪쳐 빚어진 돌개바람 때문에 잠시 잊혀져 있지만 북한 핵사찰 문제도 당장 새 대통령 당선자의 ‘발등의 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도전, 외환위기 이후 확대된 빈부격차, ‘전성시대’를 맞은 조폭(組暴) 대책 등 시급한 현안만도 꼽기에 열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데도 대선을 불과 80일 남겨놓은 현재도 각 후보진영은 ‘저 사람은 아니다’는 네거티브 공세에 주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처럼 비전이나 자질이라고 하는 본질적 요소가 실종되다 보니 대선 경쟁 자체가 ‘바람’이니 ‘이미지’니 하는 부차적 요소에 흔들리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와중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진영의 경우는 ‘병풍(兵風)’이 한창이던 지난 여름 특보진과 의원들이 대거 동원돼 전 의무부사관 김대업(金大業)씨의 거친 입심에 대처하기 위해 검찰청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당내 분란에 시달리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나 무소속 정몽준 의원측도 ‘바람’에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정 의원의 경우는 “신당이 창당되면 의논해 구체적 정강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스스로 준비부족을 실토할 만큼 대권준비에 관한 한 ‘현재 진행형’의 상태다.
그러나 시곗바늘을 돌려보면 민초들로부터 ‘꽝’이란 평가를 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측은 이미 대선 1년반 전인 91년 여름부터 ‘동숭동팀’을 가동시켜 집권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시작했었다. 지금이라도 각 대선 후보진영이 ‘성공할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과제라는 점에 진지한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