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돈 버는 기계

  • 입력 2002년 9월 9일 18시 08분


프랑스어에 ‘메트로(m´etro) 불로(boulot) 도도(dodo)’라는 말이 있다. 지하철인 메트로를 타고 겨우겨우 출근해 회사에서 힘들게 일(불로)을 한 뒤 귀가하면 피곤에 지쳐 잠(도도)에 빠지는 대도시 봉급생활자들의 고단한 삶을 가리키는 현대적 표현이다. 우리나라 샐러리맨 대부분의 생활도 그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 출퇴근 때마다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심신의 상태에 관계없이 꼬박꼬박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일상이 피곤하고 재미없지만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샐러리맨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안온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기꺼이 ‘메트로 불로 도도’의 길을 걷는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또는 상사와의 불화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퇴근 후 동료와의 한잔 술로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의욕을 찾는다. 휘청대는 걸음으로 집에 들어서지만 가족이 밝은 미소로 맞아주면 하루의 피로 정도는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얼마나 착한 한국 샐러리맨들의 평균적인 모습인가.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한가 보다. 어제 여러 신문에 보도된 이혼소송의 당사자인 금년 49세의 남자는 샐러리맨의 또 다른 불행을 보여준다. 그는 신혼 초부터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맡기고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고 한다. 가정을 위해 헌신한다는 자세를 가진 것은 물론 낭비벽도 없는 성실한 남편이었던 것 같다. 명문대 출신인 데다 대기업 임원까지 지냈으니 사회적 능력도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온갖 수모를 당하다 20여년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내면서 주요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해야 하는 희귀한 사례의 주인공이 됐다.

▷이혼을 승인한 서울가정법원 판사의 판결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끈다. “남편을 돈 버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돈을 많이 벌 것을 강요하면서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한 아내의 책임이 인정된다.” 다른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크게 보아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취급한 ‘별난 아내’의 잘못을 인정한 판결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메트로 불로 도도’의 피곤한 삶을 감수하고 있다. 이 세상 남편들을 대신해 한마디하고 싶다. 아내들이여, 우리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시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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