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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9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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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누구나 믿었던 것들이 몰락하고, 마침내 미래를 이끌 수 있는 힘들이 사라지며 유동성이 그 자리를 차지해 가고 있다는 시대에 무거운 책 한 권이 나왔다. 저자(대구대 교수·지리학)는 재미있는 지적 편력의 소유자다. 1980년대 후반에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푸코, 하버마스, 기든스 등의 이론에 기초한 공간이론을 좌파 사회과학계에 발표했다가 강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전선을 흩트린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그 후 그가 당시에 풍미했던 정통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치열하게 공부하고 마르크스주의 공간이론의 건설에 오랜 동안 매진한 결과가 이 책이다. 많은 강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새로운 안식처로 푸코, 하버마스, 기든스에 의존하거나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 에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 강조▼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기본 주장은 현대 사회생활의 이해와 실천에서 공간이 근본적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고, 그것도 역사가 끝났다는 이 시대에 마르크스주의 공간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공간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분석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은 아니다. 사실 근대이론에서는 공간보다 시간이 우위라고 할 수 있다. 진보, 발전 등의 약속은 모두 시간이라는 척도로 이해돼 왔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시간표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공간표라는 단어는 낯설다.
우리 시대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공간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푸코의 언급 등 최근 사회과학계에서 공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간개념의 복권은 진보정치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단순한 물적 토대, 자기완결적인 폐쇄체계로 공간을 자리매김 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경계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공간론을 건설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 쟁점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주제는 공간의 생산, 도시화, 지방자치, 세계화, 삶의 질, 건축경관, 소비, 생태환경, 지정학, 공동체운동, 유토피아 등으로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모든 주제에 대해 이론적 쟁점을 정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 저자의 방대한 지적편력이 놀랍기만 하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공간론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본에 의한 공간의 정복논리를 집요하리만큼 주장한다. 도시공간은 상품생산을 위한 자본과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토대이고(58쪽), 자본축적의 논리는 생산활동 뿐만 아니라 소비활동의 시공간을 지배하며(65쪽), 포스트모던 건축양식과 그 상징성은 가치실현의 위기에 직면한 자본의 새로운 대응양식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234쪽). 책 전체에 전개돼 있는 이런 주장은 현대공간이 기본적으로 자본축적의 기능공간이라는 저자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포스트주의적 실천론 거부▼
그러나 여기에는 공간자체의 상품화 메커니즘이 빠져 있다. 공간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한 하부구조적인 측면과 더불어 시장에서 가치를 실현하는 상품으로서 공간(임대료 수입의 물적토대, 자본이득의 창출대상) 측면이 있다. 저자의 주장을 보다 엄밀하게 전개하려면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면 자본주의 공간논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저자는 여기서 지리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살리는 동시에 각종 포스트주의적 실천론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공간은 자본주의적 기능공간이면서 그 존재양식은 사회적 관계의 갈등과 긴장을 반영하고 자본과 노동간의 내적모순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69, 57쪽). 이 때문에 공간문제와 관련한 실천은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것과 연계되지 않고는 커다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예컨대 도시사회운동은 신보수주의적 시민사회운동으로 왜곡될 수 있으며(74-75쪽), 계급정치로부터 분리된 생태정치는 신비주의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273쪽).
하나의 대안적 실천전략으로 제시하는 것이 공간의 구체성을 반영한 유토피아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인 D 하비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시하는 유토피아(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저하게 배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간적 불균등 발전이 내포하는 공간적 구체성을 담지 못했다는 것이 하비의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 유토피아 건설은 자본주의의 역사지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한 분석 결여한 주장 많아▼
마르크스주의 공간론을 통해서 현대 사회문제의 극복과 사회과학계의 방랑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에서도 다소 흠집은 나타난다. 다양한 문제에 개입하려다 보니 탈자본주의적 시장기능, 초테러리즘 등 개념이 모호한 용어와 추상적인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독자를 거슬리게 만든다. 또한 엄밀한 분석을 거치지 않은 선언적 주장이 많은 것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정치적 대안전략 제시에서도 이런 측면이 많이 보인다. 공동체복원을 위한 아파트주민운동은 세계적 차원에 내재된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기 위해 체계적 생산양식을 점진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개선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주장(372쪽)에서는 실천전략제시에 대한 저자의 ‘지적 힘겨움’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누워서 볼 수 있는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지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완독하는 독자에게 그 만한 노력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김용창 세종사이버대 교수·도시사회지리학
kimyc@cyber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