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웃기는 세상 확 엎어버려! '도발'

  • 입력 2002년 5월 31일 17시 34분


팝 아트 작가 중 유일하게 입체작업에 전념했던클래스 올덴버그의 1976년 작 '빨래집게'
팝 아트 작가 중 유일하게 입체작업에 전념했던
클래스 올덴버그의 1976년 작 '빨래집게'
도발/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327쪽 1만7000원 이후

1952년, 작곡가 존 케이지는 뉴욕의 한 야외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에게 말했다. “피아노 앞에 걸어가서 정확히 4분 33초 동안 앉아만 있다 걸어나오게.” 곡의 제목은 ‘4분 33초’ 였다. 한 예술평론가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곡은, 근처에 있는 나무 옆을 스치는 바람 소리,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로 가득찼다.”

기자는 대학 재학시절 이 곡을 관현악곡, 합창곡, 현악4중주곡 등으로 편곡한 바 있다. 저작권을 얻어두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이보다 앞서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했다. 오늘날 이 작품과 유사한 신형 디자인의 매끈한 ‘샘’들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한 채 도처에서 사람들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아방가르드’의 모습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괴짜 예술가들의 창의력(잘봐주어서) 또는 기행(奇行)의 산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을 뒤집는 ‘파괴적’ 행위와 실험들이 자아내는 진풍경들…. 이 책은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진휘연 지음·민음사)와 더불어 21세기를 맞은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미적 성과를 ‘역사’ 및 ‘정신’의 차원에 비추어 총체적으로 조명한 최신 저작물 중 하나다.

이 책의 저자 눈에 비친 아방가르드는 굳이 예술가연(然)하는 소수의 돌발적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인 애론슨에 의하면, 60년대말 우드스탁의 히피 축제, 오늘날 랩 음반의 샘플링, 사이버펑크족이 디지털 음향에서 찾는 자극 등에 아방가르드의 밈(meme·끊임없이 복제 전파되는 ‘의미’의 단위)은 가득히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방가르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M-TV의 현란한 30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애론슨은 미국의 청소년 도서 전문출판사 ‘크리켓 북스’의 편집장이자 문화사가. 그의 프로필이 암시하듯, 보스턴 글로브상을 받은 최신도서 ‘월터 롤리 경, 엘도라도를 찾아서’를 비롯한 그의 저작물은 젊은 층에게 일정한 교양적 포만감을 선사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무조건 ‘짜깁기’에 그치지 않는 자기만의 색깔을 적지 않게 쌓아놓는 것은 그의 책이 가진 또하나의 미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방가르드의 축을 가르는 선명한 이분법을 제시함으로써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출범시킨다. 그에 의하면 아방가르드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으로써, 그 실천 방법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이미지 감각 충동을 좆아서 내면으로 여행’하는 방법으로서, 이 경향의 예술가들은 명상 신비주의 약물 심지어 자해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반항을 밖으로 표출해 경직된 규범 도덕 제도에 맞서는 예술을 창조’하는 방법으로서, 이 그룹의 소속자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관객을 공격하며, 심지어 이들의 예술을 이해 못하는 관료들을 비난’ 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고 쾌락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9세기말 외부세계를 자신의 내면에 투사했던 ‘인상주의’(Im-pressionism)와 내면의 불협화를 외부세계에 절규해낸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대립항이 아방가르드의 역사 내내 하나의 추동력으로서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셈인데, 그런 그의 견해는 분명 완벽하게 독창적이지는 않을 지언정 되돌아 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이 둘의 대립항은 정-반을 거쳐 심지어 ‘합’으로 수렴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예를 들어 조금 전 ‘엑스터시’를 복용한 로커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 과격한 샤우팅 창법을 구사한다면, 애론슨적 대립항에 따르면 안으로의 ‘내면여행’과 밖으로의 ‘반항표출’이 일시에 해결되는 셈이다.

애론슨의 아방가르드 분석이 가진 또하나의 특징을 들자면, 그것은 아방가르드의 적자(嫡子)에 주어지는 영예를 (특이하게도) 현대의 미국문화에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나 짐 모리슨의 음악까지도 아방가르드의 반항의식과 선구적 정신을 계승한 미국의 자랑스러운 열매들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애국심이 지나친 나머지 이 저자는 종종 ‘오버’하는 모습을 서슴지 않고 노출시킨다. 이를테면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그들이 꿈꾸는 젊은 미국의 승리였고’ 잭슨 폴록의 그림들은 ‘그 자체로 새롭고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마치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것처럼’ 완벽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아방가르드의 적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후반의 미국 수집가들과 큐레이터들이 이미 아방가르드에 정통했고 뉴욕 현대미술관이 세계 최고의 입체주의 예술품들을 소장했던’사실을 재차 강조해야만 했으니 그의 탁월한 애국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심만만하고 읽기쉽다’(퍼블리셔스 위클리) ‘재기발랄하고 엄밀하다’(뉴욕 타임스) 는 등의 격찬이 유독 미국 언론매체의 것으로만 인용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까?

본문으로 되돌아가자. 저자가 끈질기게 지적하듯 아방가르드는 ‘전위’에 앞서 ‘반항’이었다. 마오쩌뚱도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했으니, 반항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시초가 ‘일상생활 도덕규범 예술규범 등이 한 줄로 깔끔하게 늘어서’ 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폭로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이처럼 얄팍’한 중산층의 얄팍한 삶과 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비롯됐다고 본다. 그러나 반항을 아방가르드의 전제로 본다면, 반항이 일반화되고 ‘제도’가 되는 순간 아방가르드는 설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도 그 점을 기자 못지 않게 걱정하고 있다. ‘세계 도처가 아방가르드라면 도대체 뭐가 아방가르드인가?’ ‘충격적인 예술이 록 밴드처럼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 점을 잘 나타낸다.

그렇다. 그 자체가 운동에서 제도로 변질되는 순간, 아방가르드는 문자 그대로의 전위성과 추동력을 상실하며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보수적 기구의 폭력성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미국의 유명 지휘자인 존 모체리는 작곡학도였던 50년대의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내적인 욕구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피아노 줄에 고무공을 끼우거나, 우연히 3화음이 등장하면 불협화음으로 다시 산산히 흩어버리는 그런 음악만을 쓰고 있었다. 내가 평소 쓰고 싶던 음악을 과제로 제출했더니 그들은 F학점 판정을 내렸다. 나는 주저 없이 대학을 그만두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