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성동기/"명예를 먹고 산다더니…"

  • 입력 2002년 1월 25일 18시 27분


“명예를 먹고 산다더니….”

군 관계자들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해군에 보물 발굴 사업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놓고 계속 말을 바꾸고 있다. 마치 정치권에서 횡행하는 식언(食言) 행태를 연상케 한다.

우선 해군 측은 이번 주초 ‘이씨가 지분 15%를 받는 대가로 국가정보원 해군 해경 등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검찰 쪽에서 흘러나오자 제대로 사실 확인조차 않은 채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라며 일단 덮고 보자는 자세를 보였다.

“그럴 리 없다”던 해군 측은 사태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자 23일에야 이씨가 해군에 장비와 병력 지원을 요청했던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해군 관계자는 이날 이씨의 요청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만 늘어놨다. 이씨가 해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인 제독을 만난 데 대해 기자들이 “평범한 민원인이라면서 어떻게 제독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해군 관계자들은 “민원을 적극적으로 들어보라는 방침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대답했다.

평범한 민원인에 불과하다던 이형택씨는 뿐만 아니라 2000년 1월 22일 사전예고도 없이 계룡대를 불쑥 찾아가 정보작전참모부장에 이어 해군총장까지 만날 수 있었다.

말 바꾸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씨가 해군총장을 만날 당시 국정원 김모 과장을 대동했다는 사실과 현역 장군인 국정원 국방보좌관이 해군총장에게 해군 장비와 병력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는 사실이 25일 밝혀진 뒤에도 군 측의 행태는 변함이 없었다.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모른다’ ‘그런 일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로 일관하다가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나면 그때서야 ‘그런 것 같다’며 얼버무렸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군 관계자들로부터도 “이처럼 정치인들을 무색케 할 만큼 말을 수시로 바꿔서야 명예를 중시한다는 군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유지할지 모르겠다”는 한탄이 터져 나오고 있다.

성동기 정치부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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