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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월 22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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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간 냉전대결과 군부정치의 와중에서 진보정당의 출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정당들이 보수를 표방했고, 한국정치는 자연스레 이념과 정책 대신 영호남이라는 지역구도로 경쟁의 틀이 형성되었다.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지역이 문제가 되니 정당은 자연히 특정지역 보스 중심의 비민주적 구조로 짜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당은 국가 현안을 놓고 국민의 요구를 흡수해 정책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지 못했고, 국회의원이나 당원들은 지역 보스들을 위한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결국 한국에서의 정당은 사당(私黨), 즉 국가의 공적 현안들과는 관계가 먼 지역보스들간의 싸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돈-私조직 동원 우려▼
게다가 대통령이 정당 총재를 겸임해 당을 장악하자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할 수 없었고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 체제 하에서는 지역 간 연합이나 거국내각의 형성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전부 아니면 전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정권탈취를 위해 지역 간 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감정싸움이 되어가는 악순환의 구조가 자리잡았던 것이다.
민주당이 시도하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 대통령의 당직 겸임 금지, 국민경선제와 같은 조치들은 원래의 의도대로만 실현된다면 이 같은 지역주의-제왕적 대통령-정당정치의 파행이라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들을 끊어나가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상향식 공천제는 지역보스 중심의 비민주적 정당구도를 바꾸고, 대통령의 당직 겸임금지는 정당과 국회를 활성화시켜 제왕적 대통령제를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민주적 대통령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국민경선제다. 7만명의 선거인단 중 3만5000명을 일반 국민으로부터 충원한다는 제안인데, 만일 이것이 여러가지 부작용없이 실현된다면 그동안 사당화되어 버린 한국의 지역 정당이 국민정당화해 공당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여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경선제의 실시에는 몇 가지 부작용이 우려된다. 무엇보다도 경선 과정에서 돈으로 선거인단들을 매수하는 돈 선거나 조직을 동원하는 조직선거의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런데 3만5000명에 이르는 국민선거인단의 경우 투표일 5∼7일 전에 확정되기 때문에 후보들이 돈을 뿌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이 위안을 준다. 이왕이면 이러한 시간적 간격을 더욱 짧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대선 후보들이나 외부에서 사조직을 동원, 선거인단에 대거 응모하게 해 경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돈과 조직 선거의 가능성은 과거 1만명의 대의원들을 통해 대선 후보를 뽑았던 방식에서 선거인단 숫자를 7배로 늘림으로써 오히려 줄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양의 돈이나 조직을 동원했을 경우 경선 결과에 미칠 효과가 과거보다 7분의 1로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과 조직 동원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는 중앙당 주도 하에 대선 주자들이 신사협정을 체결하고 이것을 위반했을 경우 오히려 더욱 큰 정치적 부담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참여열기가 낮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실 국민은 정치다운 정치에 목말라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변화에 대한 욕구는 대단히 강하다. 이들이 처음 시도되는 정치적 변화에의 몸부림이 좌절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선주자간 신사협정을▼
여러가지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선제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고 역사적으로도 진일보한 시도라고 평가된다. 앞으로의 시행 과정에서 나타날 부작용의 비용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한 세대 동안 정치개혁을 시도하지 않아서 우리가 치러야만 했던 비용에 비교한다면 별 것 아닐 것이다. 가까운 예로 현 집권여당이 이러한 정치개혁 시도를 지난 총선 이전에 시도해서 성공했더라면 참신한 개혁 중추세력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었다면 수많은 게이트들의 유령이 지금처럼 세상을 난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 영 관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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