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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8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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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핵심과제는 민주화였고 그 잔여 과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여기서 그려지는 우리의 자화상은 언제나 ‘억압적 국가’와 ‘저항적 시민사회’였다. 정부-시민사회의 이런 ‘갈등적 관계’는 우리에게 일종의 ‘전통’이자 ‘문화’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정부-시민사회의 갈등적 관계가 전통으로 남는 동안 세계질서는 바뀌었고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에 빠르게 동승하고 있다. 조용한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요점은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중심이동과, 갈등에서 협조로의 주요부문간 관계의 전환이다. ‘중심의 이동’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확장과 정부의 약화에 따른 것이고, ‘관계의 전환’은 ‘제도화된 시민단체’의 특성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새롭게 만들어지는 질서 가운데 가장 부각되는 대목은 ‘기업-시민단체’의 ‘협조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사실 우리에게 대단히 생소한 것일 뿐더러 이른바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크게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처럼 버거운 전환의 과제에 한 걸음 크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참고서로서의 의미가 크다. 미국의 비영리단체와 기업의 모범적 파트너십 사례를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각 사례마다 성공요인과 파트너십의 효과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특히 이 책은 사례연구에 일반적인 사실 나열의 지루함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파트너십의 유형화 모델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제휴형태로 기업이 시민단체에 돈이나 물자, 서비스를 기부하는 ‘자선차원의 교환’, 기업이 시민단체와 제휴해 고객 및 판매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마케팅차원의 교환’, 시민단체가 기업으로 하여금 상품 및 서비스생산능력을 확대하도록 해서 더 큰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경영차원의 교환’ 등 세 가지 범주의 교환유형을 그려낸다.
미국 이해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전망과 결부시킬 때 문제는 역시 한국과 미국의 제도적, 문화적 거리일 것이다. 전환의 과제는 CEO나 비영리단체 리더십의 혁신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법적 제도적 장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역시 시스템의 전환과 관련돼 있다.
다른 한편 이런 모델들이 강조됨으로써 우려되는 사실은 시민단체의 ‘미국화’이다. 그것은 곧 시민단체의 시장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기업과 시민단체의 파트너십은 ‘기업의 사회화’와 ‘시민단체의 기업화’의 동시적 경향을 수반한다. 이 가운데 후자의 경향은 시민단체의 저항적, 갈등적 기능을 크게 위축시킴으로써 수동적 시민사회를 만들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 시민사회는 기업의존적이고 시장화된 시민사회에 다름 아니다.
아직 시민단체의 자율성이 크게 미흡하고 기업문화 또한 폐쇄적인 우리의 경우 어쩌면 ‘아름다운 제휴’는 ‘추한 결탁’으로 비칠 수 있는 여지가 더 큰 것도 사실이다. 전환의 과제에 직면한 고민의 지점이 여기에 있다.
조대엽(고려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