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훈/‘인권대통령’의 그늘

  • 입력 2001년 12월 17일 18시 12분


1972년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오대양호가 납북된 이후 25명의 납북 선원들이 살았던 경남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 간곡마을 주민들은 당국의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주기적으로 형사들이 조사하는 것은 물론 형사가 아예 마을에 상주하며 납북자 가족들을 감시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포기해야 했고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는 주민 이모씨(38)는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각종 제한에 걸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정권은 집권 이후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인권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전향 장기수를 북에 보내기도 했고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치적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들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인권 대통령’이라고 공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씨처럼 여전히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납북 어부 문제는 대표적인 경우. 정부는 ‘의거 입북자는 있지만 납북자는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밀려 보상과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또 고문 때문에 간첩으로 몰렸다고 주장하는 각종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도 군사독재 시절과 마찬가지로 재심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현 정권의 인권정책이 지나치게 ‘민주화 운동’ 관련 사안에 집중됐으며 힘없는 민초(民草)들이 관련된 보다 심각한 인권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할 말은 많지만, 말할 힘도 기회도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더욱 소중하고 이들이야말로 정부의 ‘힘’을 누구보다 아쉬워한다는 점을 ‘인권 대통령’이라면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이훈<사회1부>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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