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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1일 2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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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인 54년 스위스대회를 시작으로 98년 프랑스대회까지 모두 5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14번의 본선 1회전 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4무10패의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이 회를 거듭할수록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꾸준히 좁혀왔던 것은 사실이다.
64시간의 장거리비행 끝에 헝가리와의 첫 경기 당일에야 도착할 수 있었던 54년 스위스 대회는 사실상 참가에 의미가 있었다. 헝가리전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전원 수비에 나섰지만 전반에만 4골을 내주더니 후반 들어 여독도 풀지 못한 선수들의 다리에 잇따라 쥐가 나 쓰러지면서 5골을 추가로 헌납했다. 0-9패. 이 점수는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 최대 점수차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이어 터키와의 2차전에서도 0-7로 완패했다.
이후 한동안 월드컵과 인연이 없었던 한국은 86년 멕시코대회 때 32년 만의 본선 진출을 달성했다. 허정무 최순호 김주성은 물론 독일 분데스리가의 영웅 차범근까지 앞세운 한국은 내심 ‘돌풍’을 기대했지만 세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한국은 이 대회 3경기에서 불굴의 투혼으로 막판 추격을 거듭, 세계 축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2002월드컵까지 5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한국은 대회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0-3으로 리드당했으나 박창선이 30m짜리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출전 사상 한국의 첫 골을 기록했다. 이어진 불가리아전에서 한국은 첫 승을 노렸지만 어이없는 골키퍼 실책으로 선취골을 내준 후 김종부의 만회골로 아쉬운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선취골을 내준 한국은 최순호의 동점골로 기세를 올렸으나 심판의 편파판정 속에 잇따라 2골을 빼앗겼다. 허정무가 경기 종료 직전 1골을 만회했지만 승부를 뒤집기엔 이미 늦었다.
90년 이탈리아대회에서도 한국은 3전 전패의 수모를 당했다. 다만 스페인전 전반 ‘캐넌 슈터’ 황보관이 25m짜리 빨랫줄 슈팅을 작렬한 것이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가장 멋진 슛 베스트 5’에 올랐다.
이라크가 경기 종료 직전 일본 골문에 기적의 동점골을 터뜨려 천신만고 끝에 본선에 올랐던 94년 미국 대회는 한국이 2무1패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대회.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2골을 먼저 내줬던 한국은 종료 5분을 남기고 홍명보와 서정원이 잇따라 2골을 기록하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어 볼리비아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하석주가 1 대 1 찬스를 놓치는 아쉬움 속에 무승부를 기록했고 마지막 독일전에서는 0-3으로 리드당하던 후반 황선홍 홍명보의 릴레이 골로 맹추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반 36분 주심이 한국의 페널티킥 찬스를 외면하면서 한국은 더 이상의 득점에 실패했다.
98년 프랑스대회에서 한국은 하석주의 레드카드로 첫 승 기회를 놓치는가 하면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등 자중지란 속에 무너졌다. 한국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하석주가 전반 그림 같은 프리킥으로 월드컵 사상 첫 선취골을 넣었지만 곧바로 퇴장당하는 바람에 수적 열세 속에 무너졌다. 이어진 네덜란드전에서는 현재 한국 대표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적장으로 나선 가운데 0-5 참패를 당했다. 그나마 희망 없이 나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한국은 이임생의 붕대 투혼 속에 유상철이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켜 침울했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부산〓특별취재반>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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