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레임덕을 어쩔 것인가

  • 입력 2001년 11월 2일 18시 24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는 은밀하게 한 무리의 조사팀을 선진국에 내보내 레임덕을 막을 묘안 찾기에 나선 적이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경우 막판까지 떠날 시간이 예고되지 않았으니 레임덕이 일어날 리 없었지만 취임날 이미 퇴임일도 함께 정해졌던 노씨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던 심정으로 파견됐던 레임덕 조사팀은 두 달 가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갖 자료를 샅샅이 뒤졌지만 귀국 후 내린 결론은 너무도 싱거웠다. ‘뾰족한 대안이 없으며 레임덕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예방책’이라는 것이 보고서 내용의 전부였다.

▼교만 독선에 자연發火▼

일찌감치 정해진 차기 대권주자 김영삼씨가 노 대통령을 재임 내내 레임덕으로 고생시킨 주역이라면 막상 YS에게 고통의 레임덕을 조기에 촉발시켜 준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 때 청와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한 인사는 “DJ가 영국에서 돌아와 아태평화재단을 통해 실질적인 정치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YS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며 ‘DJ와 YS는 공포의 천적관계’라고 단정한다. 그 후 야당의 공세를 못 견디고 YS는 결국 아들을 감옥에 넣는 수모를 겪었으며 경제에도 눈을 돌릴 수 없어 환란을 덮어쓰고 말았다.

그 때 가해자적 입장에 있던 지금의 집권당은 당시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환영(幻影)’에 시달려서인지 레임덕이라는 용어만 나오면 눈매가 가늘어지고, 대통령 아들 얘기만 나오면 이성잃은 사람들처럼 달려든다. 전 정권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정권의 레임덕이 일찌감치 나타난 것은 힘 빠진 천적 YS가 흔들어서가 아니고 교만과 독선 때문에 자연발화한 것을 집권당이 스스로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이다.

게이트라고 불리는 각종 의혹이 야당과 언론의 창작품이라는 인식에서, 당정쇄신을 요구하는 ‘청년장교’들을 동교동 터주라는 사람들이 윽박지르는 모습에서, 국회가 해임건의한 장관을 대통령특보로 들여앉히는 고집에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고도 민심을 제대로 못 읽는 그 시력에서, 우리는 레임덕을 가속시키는 물리적 힘을 피부로 느낀다.

집권에서 퇴임까지의 과정을 인생에 견준다면 김 대통령의 권좌는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만고의 진리인 것처럼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이 노쇠하면 레임덕은 필연적 산물이다. 며느리 견제하려 곳간 빗장을 틀어 잠그고 뒤주 열쇠를 두겹 세겹 채운다고 해서 시어머니가 천년만년 충성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나이를 먹어도 곱게 늙은 사람은 아름답지만 노욕과 고집을 얼굴에 새기면서 말년을 맞는 사람은 보는 이들까지 피곤하게 만든다. 식구들이 ‘조폭’과 어울리며 동네를 소란케 하고, 충견을 풀어 비판적 이웃을 위협하고, 지역편견으로 사회를 조각조각 분열시키는 존재라면 이사를 간 다음 그들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다. 그렇다고 대대손손 그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집권 후 내내 그렇게 지낸 결과가 지난 재·보선에서 민심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로 인해 지금 집권당은 큰 혼란에 빠졌고 레임덕은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현정권이 맥없이 주저앉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적다. 정권을 지지해서라기보다 극심한 혼란의 해악을 거부하는 국민 각자의 개인주의적 판단 때문에 그럴 것이다.

▼겸허하게 국민동의 구해야▼

전제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밉든 곱든 현 정권이 레임덕의 ‘열병’을 극복하고 나머지 기간을 무사히 마무리해 주는 일이다. 레임덕을 막을 수는 없다 해도 그 해악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집권자가 레임덕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어차피 승패의 향배는 더욱 선명해질 싸움인데 굳이 맞서서 싸우려다가 안팎으로 상처만 입지 말고 곱게 종착역을 맞는 편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그런 바탕에서 지금부터 정권이 할 일은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의 정치적 동의를 구하는 데 남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재·보선 참패는 DJ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늘이 부여한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도 존경받는 퇴임 대통령을 갖기를 원한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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