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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26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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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가을 아버지를 잃었다. 오랜 병환을 앓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셨지만 병원에서 생을 마치셨고, 우리는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렀다. 요즈음 내가 부고를 받고 가는 장례식장도 모두 병원 영안실이다. 예전처럼 집에 시신을 모시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는 나날이 드물어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수척해진 얼굴로 집에 가고 싶어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저자는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죽음의 인식은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아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인간은 임신한 여인의 뱃속에 이미 죽음이 싹트고 있으며, 심장의 맥박소리는 제 무덤을 파는 삽질소리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의 은유이고, 삶의 짝이다.
이렇듯 죽음과 삶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죽음을 제대로 죽지 못하게 되면 삶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형편은 어떠한가?
저자에 따르면 지금 우리의 삶과 죽음은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이다. 삶은 죽음이라는 타자(他者)에 등 돌리고 있으면서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망각하면서 지낸다. 그러다가 노상강도같이 찾아오는 죽음에 기습당한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서로 철저하게 적대적이다.
공동묘지가 집값을 떨어뜨린다고 데모하는 고급 아파트 주민의 모습, 병원 영안실에서 ‘객사(客死)’의 모습, 그리고 짐짝 취급받는 주검과 편의 위주의 장례 모습에서 저자는 우리의 죽음이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의 한복판에서 삶을 생각하는 ‘인간다운’ 관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회피는 삶에 대한 불안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죽음을 억누르고 보이지 않게 한다. 또는 죽음을 상품화해, 죽음을 소비하고 탕진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애쓴다. 삶은 죽음 위에 군림하는 척하지만 이런 오만은 삶의 황폐화를 가져올 뿐이다.
저자는 이 시대를 죽음이 죽임 당하고 있는 시대 혹은 죽음이 학대당하고 있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죽음관과 비교해 그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한편으로 삶, 죽음, 또 다른 삶의 순환이 차단되고, 미지(未知)의 보이지 않는 세상과 기지(旣知)의 보이는 세상 사이에 긴장이 사라진 우리의 현 시대. 다른 한편으로 죽음을 두렵지 않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죽음과의 친화 방법을 알았던 우리의 옛 시대.
삶이 하나의 전체로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한계’를 떠올릴 때이다. 저자의 말대로 온전한 삶을 살려면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살아야 한다. 죽음을 용납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죽음’과 삶은 결코 반대말이 아니다.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삶과 ‘죽임’이다.
우리가 죽음을 훼손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이 손상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곰곰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장석만(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종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