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현실 따로 법 따로

  • 입력 2001년 10월 21일 18시 48분


공익근무요원 P씨(25)는 지난해 막노동판에서 돈을 벌기 위해 8일 동안 근무지를 이탈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어려워진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고 동생의 학비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P씨는 병역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은 같은 해 10월 P씨가 보석으로 풀려나온 뒤 1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고 있다. 이는 P씨가 99년 특수강도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기 때문.

대법원은 89년 형의 집행유예 기간에는 또 다시 집행유예를 선고하지 못하도록 현행법을 해석한 바 있다. 결국 P씨는 며칠 동안 병역근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거 형량까지 되살아나 최소 3년6개월 이상의 실형을 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을 고려한 재판부가 재판을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다.

집행유예 기간만큼은 근신하며 살라는 법의 취지를 생각할 때 다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실수나 불가피한 현실 때문에 ‘법적 범죄자’가 돼버린 경우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또 법원은 실형의 경우 구체적으로 개월까지 선고하지만 집행유예는 대개 6개월 단위로 기간을 정하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형량이 높아진다.

이런 가운데 서울지법 형사항소6부는 최근 집행유예 사범에게 다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하급심 재판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과중한 실형이나 이를 피하는 방편으로 남발되는 벌금형 등 적절하지 못한 형량 및 관행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법관들은 치열한 고민을 통해 ‘양형의 정의’를 세워야 하며 법적 제도는 이를 충실히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신 구속을 통한 처벌은 인권 및 개인의 삶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정은<사회부>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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