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오사마 빈 라덴 때문에’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8시 32분


‘숙제를 잘 해 놓았는데 하필 그때 개가 공책을 물어뜯어 버렸다.’

경영실적이 부진한 이유를 뉴욕 테러에 둘러대고 있는 기업인들의 속보이는 변명을 미국 언론은 그렇게 꼬집었다. 분기실적이 나빠 전전긍긍하던 미국 기업들은 테러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오사마 빈 라덴 카드’를 꺼내 들고 주주들의 질책을 면하려 든 것이다.

3·4분기(7∼9월) 3개월 가운데 테러가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기간을 굳이 따지자면 9월11일 이후 20일이 채 안 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전혀 터무니없는 일인데도 미국 기업인들이 이렇게 초등학생 수준의 ‘면피 수법’에 매달리는 것은 워낙 큰 충격에 주주들의 넋이 빠져나갔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실정 원인 테러 타령만▼

이게 어디 미국 기업만의 일인가. 나라 경제가 꼬인 근원을 테러에 둘러대려는 실패한 정책가들의 시도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회만 있으면 “테러 사태로 올해 우리 경제 ‘농사’는 완전히 망쳤습니다” 하는 식의 변명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마땅한 핑계 거리를 얻은 우리 정부는 참으로 운이 좋구나’하는 느낌을 갖는다. 정부가 언제 적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릴 정도로 오래 전부터 ‘다음 분기에는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앵무새 입놀림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 연말에 저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테러 사태는 절묘하게도 그 궁금증을 단번에 가시게 할 만큼 위력적 핑계 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이 보복에 나서면 국제 원유가격이 폭등을 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다시 한번 혼란을 맞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정부가 몇 단계 비상대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마음속으로 찜찜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따지고 비판할 분위기는 못 됐다. 장기전으로 가면 경제가 다 결딴날 것처럼 얘기하던 사람들은 미국의 공습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는데도 예측과 달리 국제 원유가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뉴욕 증시가 테러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데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방심하자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국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책 마련하는 걸 무작정 비판할 의도는 더구나 없다. 단 경제실정의 책임을 ‘빈 라덴 때문에’라고 모면하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정부의 대응방식은 달랐어야 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국민을 잔뜩 긴장시킨 채 비상회의를 열어 내놓은 정책이 약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금리인하가 고작이라면 그건 정부와 한국은행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말고 또 무슨 변화가 있는가. 이때다 하고 연일 터져 나온 호들갑스러운 증시부양책은 또 어떤가. 대통령이 ‘주식 모으기’를 제창할 때부터 일찌감치 짐작은 했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내놓는 증시대책은 ‘정부 주도의 초대형 주가조작’을 연상케 한다. 셰익스피어 말대로라면 ‘투기꾼의 죄는 그 아들이 감당하게 마련’인데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찌 훗날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들 수 있다.

지금 우리 경제의 불황이 세계경기 부진과 빈 라덴 때문만일까. 경제에서 가장 큰 해악은 ‘불확실성’인데 정권이 그걸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확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라면 경제회복은 갈수록 멀어질 뿐이다.

▼불확실성 확산 정부가 앞장▼

좌충우돌하면서 세상천지 온갖 군데에 적을 만들고 심지어 관료사회에까지 네편 내편을 갈라놓은 상태라면 반대편에 세워지는 존재들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정상이 손잡고 거창하게 화합을 다짐한 후 연일 국민적 배신감만 안겨주고 있는 남북관계도 이 시대 우리 사회에 이념적 혼란을 촉발한 가장 큰 불확실성 가운데 하나다.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정부가 법보다 행정적 권한으로 기업을 다루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또 노력해서 성취한 계층이 존중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마음 편히 이뤄질 리 없다.

자고 깨면 악재를 양산하면서 사회 불안의 원인 제공을 하고 있는 정부 여당에는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보다 작금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더 급하다. 정치권의 그런 근본요법이 선행되지 않는 한 대증요법식 경제부처의 비상대책은 공허한 핑계 거리로 비쳐질 뿐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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