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 ‘우울한 날들’의 추석

  • 입력 2001년 9월 29일 17시 42분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다. 연휴를 맞아 올해에도 3200만명의 귀성객이 고향을 찾을 것이라고 하니 실로 ‘민족 대이동’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고향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둥실 떠오른 보름달처럼 밝지만은 못할 터이다.

추석 연휴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곳 믿을 구석이 없이 무너져 내린 듯한 권력의 모습이자 그에 기생한 거짓과 기만의 추악한 ‘끼리끼리 커넥션’이다. 자고 깨면 불거지는 새로운 의혹에 도대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다. 정치인을 비롯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국가를 지탱하는 온갖 권력기관의 인사들이 지연(地緣)을 매개로 줄줄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이용호 게이트’는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자조(自嘲)를 낳고 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국가공동체인가라는 강한 회의조차 불러일으킨다. 그런데도 여권은 야당의 ‘무분별한 폭로’에 고소로 맞서겠다며 발끈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부하 공무원들에게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라며 국리민복(國利民福)의 공무원상을 강조하던 전직 국세청장인 어느 장관은 서울 강남의 요지에 ‘가족 타운’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취임 22일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그의 사직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일 뿐이다. 청와대측의 논리는 “재산 형성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과거 사안”이라는 것이다. 권력의 도덕성은 아예 제쳐놓은 듯한 이러한 인식에서 그 어떤 국민적 신뢰를 기대할 수 있겠는지 의문이다.

내기골프를 한 혐의로 쇠고랑을 차게 된 한 ‘골프장 사업가’는 “(나의 구속은) 이용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그의 사무실에 여권 인사들이 여러 차례 다녀간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도 검찰은 도박수사로 서둘러 사건을 끝내려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의혹을 풀기는커녕 새로운 의혹을 부풀리는 형국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 정체가 불분명한 ‘사기꾼 사업가’로부터 2000만원을 받고도 순수한 정치자금이라며 후원금 영수증을 내민다. 또 다른 의원은 ‘고향의 예쁜 후배들’과 함께 찾아와 만났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추석은 ‘민심의 용광로’이기도 하다. 집권측은 그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올 민심의 분노와 허탈감을 진정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의혹을 속속들이 밝혀야 한다. 이제 다른 선택은 없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