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표학길/투자 촉진시켜 경기 살리자

  • 입력 2001년 8월 13일 18시 27분


제2차 여야정 경제정책협의회가 10일 11개항의 합의내용을 발표했지만 국민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치권과 정부가 제시한 합의내용에 구체성이 결여돼 있고 추경예산안과 조세부담 경감문제 등 핵심현안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국민의 기대 속에서 성사된 여야정 경제정책협의회가 사실상 무산된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여야가 처음부터 동상이몽의 자세로 회의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여당과 정부는 구조조정이 우선이라는 구호를 팽개친 채 내년 선거를 의식한 고단위 정부지출 증대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야당은 이에 맞서 어떻게 해서든지 선심성 지출을 억제하되 선심성 감세조치로 민심을 얻어보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 여야가 경기부양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한 정국은 표류하고 민생은 다시 도탄에 빠질 것이다.

정부는 연초부터 구조조정 조치들을 지연시키면서 미국 경기의 회복에만 막연한 기대를 거는 거시경제정책으로 임하여 왔다. 그러나 미국의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오히려 불황이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자 뒤늦게 추경예산과 내년도 예산 증대를 통한 경기부양 대책을 서둘러 마련하였다.

여야와 정부는 상당한 폭의 감세안이나 추경예산 증대안에 합의한다 하더라도 국내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의 불황에 대한 구조적인 진단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진단에 적합하고 경제 이론에 합당한 경기부양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임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경제가 맞고 있는 불황은 단순한 경기순환적인 불황이 아니다. 1997년 말 겪었던 외환위기가 대지진이었다면 아직도 그 여진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현재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불황은 ‘투자여력의 소진’으로 야기되고 있는 불황인 것이다.

몇 가지 거시지표의 동향을 보면 국내 경제의 현주소가 보다 명확해진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회복이 정상 궤도에 진입한 1999년과 2000년 2년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8.6%와 7.1%를 각각 기록하였다. 총수요 부문별로는 정부부문을 포함하는 최종소비지출이 10.2%와 8.7% 증가한데 반해 총투자 증가율은 각각 1.4%와 10.7%에 불과하였다. 총투자 가운데 건설투자는 오히려 9.7%, 2.3% 감소하였으며 설비투자만 27.3%와 32.2% 증가하였다. 한편 재화와 서비스의 수출은 -7.5%, 13.8% 증가에 불과했다.

결국 지난 2년간의 경기회복은 대규모 공적자금의 투입에 의한 소비 증가와, 일부 정보통신 벤처산업에 집중되었던 설비투자 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나마 한국경제를 유지해온 전통적인 굴뚝산업들은 부채비율 200% 제한 조치를 따라가기에 급급하였다. “이미 진출했던 사업들도 내다 팔기 바쁜데 신규투자나 증설투자할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것이 필자가 만난 최고경영자(CEO)들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설비투자증가율의 분기별 동향을 보면 2000년 1·4분기 이후 57.8%, 38.5%, 30.5%로 호조를 보이다가 4·4분기와 금년 1·4분기에는 각각 11.1%, -6.6%를 기록했다. 다시 말해 수출부진보다 설비투자의 격감이 불황구조를 보다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는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대지진과 같은 경제적 재앙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어떤 국민경제를 건설하느냐에 따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부는 보다 획기적으로 정책시스템을 수술해 투자여력이 소진된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대폭적인 규제완화와 투자마인드의 조성에 주력하여야 한다.

대우그룹의 도산 및 현대그룹의 분할에서 보듯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경제력집중 규제정책은 실패한 정책이다. 따라서 공정거래위원회는 독점규제라는 원래의 업무에만 충실하면 되며 30대 기업에 대한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 및 채무보증금지 등은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 투자여력과 투자심리의 회복을 도모하는 근본적인 정책시스템의 수술이야말로 가장 합당한 경기부양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표학길(서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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