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옥자/도서 맞교환 남는 게 뭐 있나

  • 입력 2001년 7월 31일 20시 38분


작년 10월 공청회 이후 잠잠하던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또 다시 제기되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의 정부 대표는 상호 대여를 위한 맞교환 방식에 대한 합의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조사작업에 착수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작년에 구두 합의하였던 것을 공식화한 것일 뿐 달라진 것은 없다. 7월 16일 외교통상부 장관 주재로 열린 외규장각 도서 문제 자문위원회 회의에서는 정치적 접근보다는 학문적, 문화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우선 자료조사부터 진행하자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맞교환을 전제로 한 현장조사를 주장한 위원은 없었다.

이번 회담의 가장 뚜렷한 명분은 유일본을 가져온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난번에는 어람용 의궤(儀軌)만이 논의의 초점이었다. 어람용 의궤는 왕이 직접 보는 것이어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한 초록(抄錄:요약)인 경우가 많으므로 비어람용 의궤가 자료적 가치는 더 클 수도 있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유일본을 강조하는 쪽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에 있는 유일본을 국내의 복본(複本)과 교환한다는 것인데 복본이란 복사본이 아니다. 국내에 한 권 이상 있는 비어람용 의궤를 지칭하므로 용어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대부분의 의궤는 사람이 직접 쓴 필사본이어서 상호 비교연구가 필요하므로 연구자에게 덜 중요한 의궤란 없다. 의궤 연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국내에 있는 의궤를 연구하는 데도 앞으로 많은 연구인력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귀중한 국내 보존 의궤자료를 내주면서까지유일본을 가져오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할 학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프랑스에 알리기 위하여 상호교환 전시를 추진한다면 우선 파리에 한국 자료관을 만들어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의궤부터 끌어내어 전시하게 하는 것이 방법론상 순리이다. 그리하여 세계인들에게 한국 기록문화의 우수성과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 사실을 알게 하고 나아가 프랑스 지성의 양심에 호소하는 편이 훨씬 간편한 방법이다.

약탈한 문화재를 국내에 보존하고 있는 멀쩡한 문화재와 교환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전개될 세계적인 문화재 반환사태 때 무엇을 주고 그 많은 해외문화재를 반환받을 수 있을지 우려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를 자행하며 남의 문화재를 강탈한 이른 바 강대국들의 입지를 앞장서서 강화해 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번 공청회에서 방청석에 있던 어느 정신과 의사의 지적대로 우리는 강대국에 대한 과대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강대국에 대한 대응일수록 명분과 논리가 강해야 한다. 양국간에 고속전철, 라파엘 항공기 등 이해관계가 생길 때마다 의궤를 흥정거리로 내밀고 있는 프랑스의 저급한 외교행각과 거기에 휘둘리는 정부의 줏대 없음에 국민은 식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도 유념해야 한다.

독일이 소장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약탈당한 것이라고 하여 프랑스에서 전시하고 있던 것을 압수한 나라가 바로 프랑스이다. 그러한 단호한 태도는 내 것을 챙기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프랑스가 문화국가를 자처한다면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이중잣대는 단호하게 배격하여야 하리라.

우리는 이 문제를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해결해야 한다. 역사의 창으로 보면 영원한 것은 없다. 제국주의라고 영원할 리 없고 오늘의 강대국이 내일의 강대국이라는 보장도 없다. 문화재를 약탈당한 나라는 다수이고 약탈한 국가는 소수이다. 이 일은 차라리 세계질서의 변화와 거기에 조응하는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온당하다. 후손들이 큰소리치며 떳떳하게 완수할 임무를 남겨둬야지 내 물건을 주고 약탈당한 문화재를 바꾸어 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그들의 발목을 잡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0여 년 전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될 때만 하더라도 약탈당한 문화재를 반환받자는 소박한 희망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어느 사이에 내 물건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사태로까지 되었다. 어찌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오직 안타까울 뿐이다.

정 옥 자(서울대 교수·국사학, 규장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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