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칠용/역사드라마 '소품 왜곡' 심하다

  • 입력 2001년 7월 29일 18시 29분


근래 방영되고 있는 KBS 1, 2TV 프로그램 중에서 ‘명성황후’ ‘왕건’ 등 사극과 TV소설 ‘매화연가’ 등을 보고 있으면 한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TV 화면에 등장하는 소품과 배경에 대한 고증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 문화강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의 TV 드라마 운영 수준에 대해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선 KBS 2TV 수목드라마 ‘명성황후’는 시대적 배경이 1871년 대원군 섭정시대인데 어찌하여 중전의 방, 그리고 문갑이나 선비상 위에 근래 제작돼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자개 필통이 놓여 있는가. 또한 요즘 한복집 포장 상자로 사용되고 있는 한지 공예품들이 자주 눈에 띄고, 중전이 꽂고 있는 비녀 또한 2000년대에 제작되고 있는 유광 칠보 제품이다.

KBS 1TV 대하드라마 ‘왕건’에서도 궁예, 견훤, 왕건 등 왕이 참석하는 주안상을 보면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할 뿐 음식엔 아예 젓가락이나 수저가 가질 않는다. 22일 일요일 저녁에 방영된 ‘왕건’에서는 왕건의 의형제들이 혼쭐난 후 퇴장한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일등공신들이 들어와 그대로 술잔을 드는 등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장면이 많았다.

TV소설 ‘매화연가’는 더욱 가관이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경찰서 형사의 사무용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금속 서류 진열대, 호텔 사장의 책상 위에 있는 자개 명패 등은 모두 6·25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생학교 학생들의 야한 복장, 고급 자개 단추들, 교장 선생님 방에 놓인 1990년대에 생산된 12자 목상감 양복장이나 문갑, 광명단을 발라 번쩍번쩍 빛나는 용기 등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준다. 23일 방영된 MBC TV 사극 ‘홍국영’에 나온 기생집 술상도 근대 이후 제작된 교자상이다.

선진 외국의 영화나 TV는 극중 인물이나 줄거리도 매우 중요시하지만 무엇보다도 배경이나 소품 등에 더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을 우리의 방송 관계자들은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역사물에 자주 등장하는 의상의 흉배(胸背)만 하더라도 왕들만 사용하던 것이 단종 이후에 와서야 신하들의 의상에도 흉배를 달게 됐는데도 곳곳에 사실과 다른 의상을 한 장면들이 나타나고 있다.

TV 사극 담당자들은 민속박물관이나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고증을 받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각종 소품과 배경물 등은 한국의 전통 공예품이기 때문에 잘못 놓여져 방영될 경우 전통공예 전승자들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조상의 얼이 가장 진하게 밴 민속공예의 전승에도 지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요즘 국내 드라마가 중국은 물론 미얀마, 베트남, 미국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파를 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외국인들은 물론 국내 청소년들에게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대로 심어주기 위해서는 방송 프로그램 하나라도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해야 한다.

이 칠 용(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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